[글로벌포커스] 유럽이 미국 따라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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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파리에 도착하던 날 에펠탑 전광판에 표시된 숫자는 '996' 이었다.

낮밤이 바뀌기를 그만큼 거듭하면 2000년이란 소리였다.

뭉텅 잘려나간 전광판 숫자를 확인할 때마다 살같은 시간의 흐름에 상념이 머물곤 했지만 그래도 새 천년은 아득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시나브로 옛 천년의 마지막 날은 왔고 즈믄해의 마디가 바뀌는 그 순간 에펠탑을 에워싼 축제인파에 묻힌 건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새 천년의 여명을 뚫고 3백20m 높이의 철탑이 뿜어내는 오색찬란한 불꽃의 폭포는 기억에 남을 구경거리였다.

날과 해를 바꾸는 시간의 단위가 과학적 지혜의 소산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마치 그것이 신의 섭리라도 되는 양 사람들은 샴페인에 질펀히 젖은 환호성 속에 서로 부둥켜 안고 춤추며 새 천년의 아침을 맞이했다.

모진 바람으로 88명이 죽고 전기가 끊긴 60만 가구가 어둠 속에 떨며 새해를 맞고 있다는 사실도 그 순간만큼은 프랑스의 현실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축제의 짧은 미망(迷妄)의 시간이 지나면 현실의 무거운 짐이 기다리고 있는 법. 해가 바뀌어도 체첸의 포성은 그칠 줄 모르고, 종교적 광기가 흉탄으로 돌변하는 중동의 현실도 달라지지 않았다.

폭풍이 할퀴고 간 프랑스는 6백억프랑(10조원)짜리 견적서를 앞에 놓고 수심에 빠져 있다.

그 뿐인가.

세계인구 4명 중 한명이 하루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이 해가 변했다고 달라질 수 있겠는가.

그에 비하면 또 한번의 '미국의 세기(世紀)' 를 예감하는 유럽의 조바심은 차라리 사치스런 짐같아 보인다.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2000년 1월 1일자에 두편의 사설을 실었다.

'미국의 세기' 라는 제목은 둘 다 같은데 한쪽에는 물음표가 없고 다른 쪽에는 물음표가 있다.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는데 의문부호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면 21세기도 미국이 판을 짜고 주도하는 미국의 세기가 될 것인가.

'미국의 세기는 한번으로 족하다' 는 것이 향수를 간직한 유럽인들의 생각이지만 헛된 자만(自慢)이 아닌가를 르몽드는 냉정하게 묻고 있다.

우드로 윌슨의 국제주의가 미국의 젊은이들을 대서양 건너 1차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내몰면서 미국의 20세기는 막이 올랐다.

2차 세계대전에 이어 긴 냉전의 끝인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20세기 미국 패권의 완성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영국의 지성 에릭 홉스봄의 표현을 빌리면 1917년에 시작돼 1989년에 끝난 '짧은 20세기' 는 미국의 세기로 이미 막을 내렸다.

미국만이 갖추고 있는 지구적 차원의 군사적 투사력(投射力)은 이라크와 코소보에서 입증됐다.

정보통신 혁명이 주도하는 신경제의 경기순환을 모르는 연속호황은 세계인구의 4%가 전세계 국민총생산(GNP)의 27%를 산출하는 힘이 되고 있다.

맥도널드 햄버거와 할리우드 영화로 상징되는 문화적 파급력과 세계무역기구(WTO)를 '트로이의 목마' 로 한 국경파괴는 세계화란 이름 아래 모든 기준을 미국에 맞추는 미국화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두번째 미국의 세기는 지금부터가 아니라 10년 전 이미 베를린에서 시작됐다.

미국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 87년 '강대국의 흥망과 성쇠' 에서 미국의 몰락을 예견한 건 성급했다.

가까운 장래에 미국이 몰락할 조짐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유럽은 21세기 다극(多極)체제를 말하고 있지만 적어도 수십년내에 유럽연합(EU)이나 중국 또는 러시아가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국제질서의 한 축을 맡을 것으로 보긴 어렵다.

유럽이 단일통화로 무장하고 오데르-나이세강과 보스포러스해협 너머로까지 회원국을 확대하고 독자방위체제를 갖춘다 하더라도 미국의 독주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그러기엔 정치적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

유럽합중국의 실현은 장 모네와 로베르 슈망의 이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이다.

'나의 길' 을 고집하며 무력한 훈수꾼으로 남을지, 철저히 미국의 아류(亞類)가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럽으로서 고통스런 선택일 수밖에 없다.

"미국인은 키가 크기 때문에 더 멀리 볼 수 있다" 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말하고 있다.

미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파프는 냉정한 계산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덕성이 혼합된 '자선적 패권' (benevolent hegemony)을 얘기하고 있다.

미국 지배력의 비밀은 힘과 이상주의의 독특한 결합과 철저한 민주주의에 있다고 르몽드는 분석한다.

미국이 그 비밀을 틀어쥐고 놓지 않는 한 자력으로 유럽이 21세기를 '유럽의 세기' 로 돌려놓기는 어렵다는 자각이 축제의 불꽃이 꺼진 에펠탑 주변을 쓸쓸한 메아리처럼 떠돌고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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