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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민생법안, 정치현안과 분리 처리하는 지혜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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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정기국회가 정당 대표연설에 이어 대정부 질문을 하고 있다. 다음 달 2일은 내년도 예산안을 처리하기로 돼 있다. 그러나 최근 여야의 움직임을 볼 때 또다시 정치공방으로 날을 새우지는 않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해마다 정치 쟁점을 볼모로 해를 넘기기 직전에야 예산안과 법안을 몰아치기로 날탕 처리하는 관행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올해는 세종시 등 주요 정치 쟁점들까지 가로막고 있다.

지난해 정기국회는 미디어법에 매달려 민생을 팽개쳤다. 국회에 제출된 법안은 2069건, 그 가운데 본회의에서 처리된 것은 125건에 불과했다. 그것도 폐회를 하루 앞둔 12월 8일 무려 96건의 법안을 한꺼번에 통과시켰다. 심지어 문방위·운영위·정보위는 법안을 한 건도 처리하지 않았다. 또다시 그런 모습이 재연돼서는 곤란하다.

이번 정기국회도 처리해야 할 민생법안이 한둘이 아니다. 수많은 논란을 벌였던 비정규직 문제는 8805억원의 지원책이 마련돼 있지만 관련 법안의 처리가 지연돼 집행이 안 되고 있다. 재래시장을 육성하기 위한 영세상가 살리기 법안이나 중소가맹점의 수수료 상한제를 도입하는 카드수수료 다이어트법안, 통신요금 다이어트법안도 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상조피해방지법안, 악덕사채근절법안, 영유아보육법안, 장애인복지법안 등도 마찬가지다. 내년 초 발효하지 않으면 선점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한·인도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 동의안, 한·미 FTA 동의안과 부수법안도 화급한 사안이다. 특히 문방위에서는 게임의 사행성을 방지하는 게임산업진흥법안 등 소관 법률을 1년이 넘게 모두 묻어놓고 있어 불만이 팽배해 있다.

중요 정치 쟁점을 둘러싸고 여야가 치열한 공방을 벌이더라도 민생마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 특히 야당은 정치현안과 민생법안을 연계해 공세를 벌이던 고전적 수법을 이젠 버려야 한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누가 진정한 서민정책의 대변자인지 경쟁할 것이며, 그런 차원에서 예산 투쟁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정기국회에 임하는 민주당의 태도는 정 대표의 다짐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어제는 다른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들까지 합세해 국회 본청 앞에서 미디어법 폐지를 요구하는 규탄대회를 열고, 여의도 일대에서 대국민 홍보전을 벌였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장외투쟁을 병행하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정치공세를 위해서는 예산심의도 민생법안도 안중에 없다는 태도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 치열하게 정치투쟁을 벌이면서도 예산과 민생은 철저히 챙기는 게 야당의 전통이다. 강경노선으로만 치달아서는 당장은 장악력을 높이는 듯해도 종국에는 지도력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올해 국정감사도 미디어법에 매달려 강경투쟁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겉핥기에 그쳐 여당보다도 못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정치적 입지는 성의를 다해 민생을 챙기고 현명하게 국면을 이끌어갈 때 넓어지는 것이다. 여야가 정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민생법안만은 분리해 먼저 처리하는 지혜를 발휘해줄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