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Special Report] 손목시계 100년, 기술이 예술을 낳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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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촬영협조=꽃과 건축을 주제로 한 크로노스위스의 ‘자이트자이헨 Ⅱ’ 시계.
윗면뿐 아니라 다이얼 판도 투명해서 무브먼트를 볼 수 있는 시계를 ‘스켈레톤’이라고 한다.

흑백 무성영화 속, 중절모를 쓴 신사는 우아하게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본다. 이젠 벼룩시장 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회중시계’다. 우리가 보통 ‘시계’라고 부르는 손목시계의 조상. 손목시계는 이 회중시계를 작게 만들어 손목에 착용할 수 있도록 줄을 매달게 되면서 틀이 완성된다.

여성이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일까. 남성의 유일한 액세서리인 손목시계는 사실 여성용보다 뒤늦게 보편화됐다. 남성이 손목에 시계를 장착하게 된 계기는 간단하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일일이 꺼내는 일이 얼마나 귀찮고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되면서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부터 손목시계는 본격적인 발전을 시작한다.

항공기와 함게 발전한 파일럿 워치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손목시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인류의 역사에서 획을 긋는 역사적 장면들과 맞물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초, 항공기의 등장과 발전은 파일럿 워치를 낳았다. 항공 역사의 명장면 중 하나인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 성공’은 론진의 ‘아워 앵글 워치(Hour Angle Watch)’ 개발로 이어졌다. 린드버그의 조언으로 완성된 이 시계에는 정확한 시간을 표시하는 기본적인 기능 이외에도 정확한 항로를 파악할 수 있도록 고안한 스케일이 달려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공기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동안 파일럿 워치 역시 함께 진화했다. IWC의 ‘마크(Mark)’, 브라이틀링의 ‘내비타이머(Navitimer)’, 브레게의 ‘타입20(Type XX)’ 등 파일럿 워치의 명작이라 불리는 많은 모델이 전쟁 종결 전후에 태어났다. 재빨리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명확한 가독성을 갖춘 다이얼, 레이더와 각종 계기에서 발산하는 자기의 영향을 차단해서 시계 내부에 자리한 무브먼트를 보호하는 이중 케이스의 장착은 파일럿 워치가 갖춰야 할 필수 항목이 됐다.

수천 미터 물 속에서 자유를 얻다

시계를 차고 수영을 한다? 이젠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계가 물속에서의 자유를 얻기까지 많은 메이커가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고 또 성공과 실패를 겪었다.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가벼운 물의 접촉을 허용하는 생활 방수에서 사람이 실제로 도달할 수 없는 수천 m 아래의 수압을 견디는 다이버 워치까지 등장했다. 방수 방법의 표준안은 롤렉스의 ‘오이스터 퍼페추얼’이라는 시계가 제시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듯하다. 틈새를 막기 위해 고무패킹을 넣고 크라운과 케이스 백을 돌려 넣은 이 시계는 이름처럼 입을 꽉 다문 굴 모양으로 완벽한 방수성을 확보했다. 이후 롤렉스는 다이버 워치의 명작이라고 불리는 ‘서브마리너’를 1950년대 초반 발표하면서 그 명성을 이어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소개된 초기 다이버 워치로는 오메가의 ‘시마스터(Seamaster)’와 블랑팡의 ‘피프티 패덤스(Fifty Fathoms)’ 같은 모델이 있었다. 이들은 방수 방법의 노하우를 거듭 새로 담아내며 지금까지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다.

전쟁터서 거리 재던 크로노그래프

크로노그래프는 보통 스톱워치 기능을 갖춘 시계를 말한다. 단순한 계측에서 맥박을 재는 의료용으로까지 다양하게 사용된다. 군사 용도로는 적군의 함포가 발사한 포탄의 불빛과 들려오는 소리의 시간차를 측정해 전함이 떨어진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사용했다. 크로노그래프 기능은 모터스포츠가 등장하면서 기록의 정확한 측정을 위해 그 활동 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모나코 레이스에서 이름을 딴 태그호이어의 크로노그래프 워치 ‘모나코(Monaco)’는 스티브 매퀸이 영화 ‘르망’에서 착용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사각형 케이스에 담긴 파란색 다이얼이 아름다운 이 모델은 올해 40주년을 맞으면서 레이스 크로노그래프의 대표 모델로 더욱 발전하고 있다.

파일럿 워치, 다이버 워치, 그리고 레이스 크로노그래프는 요즘 젊은 층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스포츠 워치’의 대표적인 유형들이다. 손목시계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중간 무렵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들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태생적으로 일상과 그 이상의 상황에서도 문제없이 작동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점이 바로 스포츠 워치가 가진 매력이다.

기능은 그 한계를 완성하기 위해 극한의 기술력과 개성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이버 워치가 가진 회전 베젤은 다이버에게 잠수 가능한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 레이스 크로노그래프의 타키미터는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달려 있고 지금도 계속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와 같은 고유한 기능성과 함께 미적 감각도 추구하고 있다. ‘일상에서도 사용하고픈’ 남자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남성들이 스포츠 워치에 열광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글=구교철 시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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