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인사 8인의 신년소망] 홍신자 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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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삶의 건강함, 불끈한 근육질이 있는 곳이 현장이다. 그 곳에선 천년이 오간 지난 며칠 밤하늘과 찬란한 대낮에 쏴올렸던 불꽃을 푸른 대빗자루로 쓸고 있다. 그래도 남아야 할 불꽃의 혼을 훨훨, 시퍼렇게 지피는 대장간이 우리 삶의 현장이다. 지금 그 현장에 서있는 문화계 인사들의 신년계획을 들어본다.

◇ 홍신자 <무용가>

이곳 경기도 죽산에 정착한지도 벌써 7년이 흘렀다. 뉴욕과 인도.하와이 등 여러 곳에서 춤추고 명상하다 귀국할 당시에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번잡한 세상에서 떨어진 아늑한 장소에 터를 잡고 내 예술 세계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어찌보면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정말 죽산에 웃는 돌 하우스를 열고 매년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예술인들과 함께 죽산국제예술제를 펼치면서 이런 소망을 일부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이 한해 한해 쌓여가면서 소모되기만 하고 발전이 없는 내 자신을 문득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결단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1년 내내 미국.독일 등 빽빽한 공연 스케줄을 마치고 나면 미국이나 중국으로 떠날 것이다.

◇ 윤미용 <국립국악원장>

예년 같으면 3월에 열리던 신춘 대국악공연을 새 천년을 맞아 설날.대보름으로 앞당겼다. 그래서 국립국악원 식구들과 함께 연초부터 연습으로 바쁘게 보낼 예정이다. 올해는 문화관광부가 제정한 '새로운 예술의 해' 다. 국악은 이와 동떨어진 분야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

국립국악원에서는 국내 작곡가들에게 신작 위촉 기회도 늘리고 무형문화재의 보존에 그치지 않고 이를 현대적 감각과 첨단 기술을 가미한 완성도 높은 무대예술로 승화시키는데 주력하려고 한다. 해외공연도 지금까지 판소리 눈대목 등 짧은 발췌곡 위주로 엮은 옴니버스 스타일에서 탈피해 지난해 국내 무대에서 호평을 받은 '종묘제례악' 등의 대작을 본격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 정지영 <영화감독>

2000년이라고 1999년하고 크게 달라야 하나. 그래야만 하는 강박관념에서는 일단 벗어나고 싶다. 나에게 세기 혹은 천년의 변화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때문에 이전처럼 올해도 그저 새 영화 작업에 폭 빠져 지내면 될 뿐이다.

그러나 늘 같은 영화를 하더라도 소재와 주제에서는 뭔가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은 한다. 세기말과 세기초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이 급격히 변하는 가치의 문제라든가, 문화적 패턴의 변화 등을 진지하게 탐색해 보고 싶다. 보다 삶의 본질에 천착해보고 싶은 것이다.

개인적 '영화만들기' 외에 힘을 모아야할 게 범영화인들의 친목단체인 '영화인회의' 모임의 활성화다. 이들의 응집된 힘을 통해 한국영화 산업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길을 모색해 볼 계획이다.

◇ 윤동혁 <프리랜서 pd>

올해엔 맛진 음식을 실컷 먹게될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의 음식교류사를 정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한다. 방송위원회에 기획안을 제출해 2천7백만원의 제작비도 지원받았다.

프로그램 발상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선술집에서 가장 대중적인 안주가 우리의 곱창구이에 해당하는 호루몽야끼인 것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알고 보니 해방 이후 굶주림에 시달린 재일교포들이 일본인이 먹지 않아 버린 곱창을 주워다가 만들기 시작한 음식이었다. 사소해 보이는 음식 하나에도 우리의 아픈 과거가 숨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4세기경 백제인이 일본 왕실에 술 빚는 방법을 알려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 88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불고기와 김치는 일본인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됐다. 음식을 읽으면 한.일관계사도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 조용필 <가수>

나는 새천년을 제주도에서 맞았다. 이곳에 있는 한 호텔에서 1천년대를 마감하고 2천년대를 여는 장기 콘서트를 열고 있어서다.

나는 섣달 그믐밤 공연이 끝나자마자 성산 일출봉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떠오르는 새천년 태양 첫 빛살을 보았다. 남해바다 청정수에 깨끗이 몸을 씻고 올라온 처녀와도 같아 보였다. 그 햇살을 하염없이 온몸에 맞으면서 조용히 다짐했다.

새로운 천년에도 변함 없는 신심으로 노래 부르게 해주십사고. 올해로 나는 가수생활 32년을 넘기게 되지만 '그것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일(如一)한 '저 햇살에 비하면 손에 쥐어질수 없는 한 줌 거품에 불과하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면 제주도에서 맞은 새 천년 태양의 깨달음을 깊이 새기고 새로운 음반 제작에 들어갈 참이다.

◇ 이경자 <소설가>

그 동안 내 인생의 에너지는 욕망을 포함한 열정들이었다. 열정은 힘차 보이나 속이 비어있기 일쑤라는 걸 이제야 안다. 또한 그것이 많은 거품을 일궈 놓은 것도 보인다.

새로운 연대, 새해엔 그래서 모든 군더더기를 털어내고 천천히 깊고 넓게 살도록 하리라. 욕심만 앞세웠던 소설가의 삶이 마침내 진국을 끓이도록 노력하겠다.

내 혼을 맑게 가꿔서, 소설 속의 인물들이 누구에게 읽히더라도 싱싱하게 되살아나게끔. 내 소설을 읽은 독자가 그 속에서 고향을 되찾는 기쁨과 행복을 느끼도록. 우리가 자칫 잊고 살았던 자연의 품을 소스라치게 발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 편안하게 늙는 얼굴을 가지는 게 꿈이다.

◇ 이윤기 <소설가>

나의 2000년대 맞이 준비는 좀 어수선했다. 근 반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을 떠돌았다. 문화적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를 심정적으로 정리한다는 명분. 특히 그리스.로마 신화의 유적을 찾아 다니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수확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했던 출간 약속을 여러 건 지키지 못했다. 6월까지는 소설 쓰는 일과 그 일에 매달리려고 한다. 6월 이후부터는 신화 및 유럽 고대 종교사 저술과 사람 가르치는 일에 힘을 쏟게 될 것 같다.

소설 쓰기.고전 번역.저술 그리고 가르치기.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흉내내어 나는 이 네 가지 일로써 나의 피라미드를 세우고자 한다. 피리미드 짓기의 최종적인 목적은 한국문학이다.

◇ 이불 <설치미술가>

2000년은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로 정신 없었던 지난해의 연장이 될 것 같다. 미국과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체코 등 유럽의 유수한 미술관에서 초청이 쇄도해 '일복' 이 터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총 12회의 전시가 잡혀 있으니 한달에 한번 꼴로 내 작품을 해외 무대에 선보이는 셈이다.

이미 지난해 말 독일 본 미술관에서 개막한 '글로벌 2000' 에 신작 '아마릴리스' 가 소개되고 있다. 이 작품은 사이보그와 몬스터(괴물)를 결합시킨 것이다. 2월에는 미국 미니애폴리스 워커아트센터의 '렛츠 엔터테인(Let' s Entertain)' 전이 개막한다.

대부분 전시 기간이 3개월 이상이라 내년 미국과 유럽 등지로 여행할 분들과 객지에서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 않을까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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