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살 파산' 사망한 아버지 빚 2억여원 '상속 포기' 몰라 떠안게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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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아버지가 진 억대의 빚을 떠안았던 여덟살짜리(1996년 9월생) 남자 어린이가 법원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파산9단독 김진석 판사는 2억4000만원의 빚을 진 A군에게 법정 대리인인 어머니(39)가 낸 파산 신청을 받아들여 파산 선고를 내렸다고 5일 밝혔다.

A군이 거액의 빚을 떠안게 된 것은 98년 7월. 지방에서 김치공장을 하던 아버지가 97년 외환위기 당시 자금난에 몰려 부도를 낸 뒤 이듬해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다.

남편이 수억원의 빚을 남긴지도 모른 채 친척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장례를 치른 A군의 어머니는 이후 서울로 이사해 식당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던 중 A군 어머니는 지난 4월 법원으로부터 "농협 등 5곳의 금융기관에 진 2억4000만원의 채무를 상속인인 A군이 갚아야 한다"는 날벼락 같은 통지서를 받았다. A군의 아버지(당시 52세)가 숨졌을 때 "민법상(1005조) 법정 상속인은 빚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 '상속 포기' 등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지서는 법적 채무상속인이 된 A군에 대해 채권자들이 민사소송을 통해 승소한 뒤 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날아든 것이었다.

당황한 어머니는 변호사와의 상담을 통해 파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는 파산을 신청했다.

김 판사는 파산을 선고하면서 "법률적 이해가 부족해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겪는 것을 보니 너무 안타깝다"고 밝혔다.

A군은 현재 면책 심리를 받고 있다. 법원의 면책 결정을 받으면 아버지의 빚은 모두 취소되고 파산자로서의 신분상 제약도 사라진다.

천인성 기자

빚 상속 관련 민법 조항은

부모 등 피상속인이 빚을 남기고 숨졌을 경우 자식 등 법적 상속인들은 원칙적으로 재산뿐 아니라 빚도 물려받는다.

현행 민법에 따르면 이런 경우 상속인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우선 "빚과 재산을 모두 물려받지 않겠다"는 상속 포기(1019조)다. 상속포기서를 써서 법원에 제출하면 되고, 기간은 '빚이 있다는 것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 또 하나는 한정 승인(1028조)이다. 이는 재산과 빚을 함께 물려받는 대신 재산 액수만큼만 빚을 갚고 그것을 초과하는 빚은 갚지 않겠다는 것이다.

관련 조항은 2002년 1월 개정된 것으로, 이전에는 상속자가 숨진 지 3개월 이내에 한정승인이나 상속 포기를 해야 했다.

A군의 경우 아버지가 숨진 때가 1998년 7월이어서 개정 전 민법이 적용됐다. 따라서 98년 10월 전에 법원에 상속포기 신청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법을 몰라 때를 놓치는 바람에 파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천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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