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 뭉치면 EU 쥐락펴락 … 사르코지·메르켈 ‘전략적 동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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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니콜라 사르코지(사진 오른쪽)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왼쪽) 독일 총리가 환하게 웃으며 포옹했다. 지난달 28일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그리고 3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담장에서다. 두 사람은 2007년말부터 줄곧 사이가 좋지않았다. 외교ㆍ경제 등 여러가지 현안을 놓고 이견을 드러냈다. 그러던 그들 관계가 급속히 개선된 것이다. 메르켈은 재선 후 첫 방문지를 파리로 잡았고 사르코지도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행사에 참석한다.

두 정상의 새로운 '밀월'은 새롭게 태어나는 강력한 EU의 대표로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높이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다. 혼자로는 힘들지만 두 나라가 힘을 합치면 가능하다는 ‘전략적 동거’인 셈이다.

◆국제적 영향력 키우려는 전략적 동거=사르코지와 메르켈이 손을 잡은건 최근 세계 정세가 돌아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우선 미국의 변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 조지 W 부시 시절과는 달리 친유럽 성향이 강하다. 독불장군식 외교 스타일도 많이 버렸다. 취임 전인 지난해말부터 최근까지 G20(주요 20개국) 정상회담의 운영에서도 유럽에 역할을 많이 나눠준 바 있다. 유럽이 어느 때보다 목소리를 높이기 좋은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사르코지는 지난해 10월 글로벌 경제위기가 깊어지는 와중에 EU 순회의장으로서 유럽 각 국을 설득해 유로존 합의를 이끌어낸 바 있다. 당시 발표가 나온 뒤 폭락하던 세계 주식 시장이 급반등하는 등 세계 경제에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다. 유럽의 힘이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그 자신감을 이어가자는게 사르코지의 생각이다.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사르코지가 전략적 파트너로 영국 대신 독일을 택한 이유를 영국의 내년 총선에서 찾았다. 정권 교체가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차기 총리가 유력한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은 대표적인 EU 회의론자다. 때문에 EU의 대표로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욱이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반해 영국은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사르코지는 지난 2년간 유럽과 아프리카의 각종 분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스스로 외교무대의 ‘해결사’ 역할을 자임해왔다. 메르켈 역시 재선에 성공한 가장 큰 힘은 국제 무대에서 독일인의 자존심을 키워준데 있었다. 즉 두 정치인은 ‘외교’가 바로 자국내 정치적 기반이라는 공통의 코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외교가에서의 의기투합이 가능한 이유다.

두 사람의 외교무대에서의 첫 합작품은 12월 코펜하겐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와 독일은 환경 선진 대륙 유럽의 대표로 미국중국인도 등 이산화탄소(CO₂) 다배출국을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두 정상은 최근 유엔 반기문 총장에게 공동 명의의 편지를 보내면서 포문을 열었다. 코펜하겐 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나라가 수출하는 상품에는 환경세를 물리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기후변화 회의 직전 두 정상이 의견 조율을 어떻게 할지에 세계의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EU 대통령 만들기도 합작=사르코지와 메르켈은 EU 내에서의 리더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발효를 눈앞에 두고 있는 리스본조약은 사실상 두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불과 1개월 전만해도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EU의 초대 대통령으로 밀었다. 사르코지가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메르켈도 따라 가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세계 언론은 블레어를 사실상의 EU 초대 대통령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2주전부터 두 사람이 입을 맞추기나 한듯 “유로화를 쓰지않는 나라에서 EU 대통령이 나오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폈다. EU 정상회담 직전에 이런 주장이 나오면서 블레어 카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르코지와 메르켈이 지난주 엘리제궁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난 뒤에는 사실상 폐기돼 버렸다.

이렇게 되자 블레어 뒤를 잇던 후보군들은 모두 두 정상의 입만 바라보는 모양새가 됐다. 현재 EU 대통령에는 장-클로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와 헤르만 판 롬퓌 벨기에 총리 등 78명의 후보가 거론되고 있다.

이를 두고 르 피가로는 “사르코지와 메르켈 모두 EU 대통령이 너무 센 나라 출신이거나 튀는 사람이 오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르코지와 메르켈은 EU의 정치적 통합에 가장 적극적으로 뛰었던 사람들이다. 당연히 두 나라가 새로운 EU에서 강력한 지분을 가져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국처럼 큰 나라, 또 블레어처럼 튀는 정치인은 후보가 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모두 50대 초반의 젊은 정치인이다. 메르켈이 연임에 성공했고 사르코지 역시 지금 분위기로는 재선 가능성이 큰, 한마디로 롱런이 가능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두 사람의 공조는 자국 내에서도 서로의 이미지에 점수를 더 하는 ‘윈윈전략’ 상품으로 보인다.

한편 체코 헌법재판소는 3일 리스본 조약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바츨라프 클라우스 체코 대통령이 곧 이 조약의 비준안에 서명할 것으로 전망된다. 클라우스 대통령이 이 달 안에 서명하면 이 조약은 이르면 다음 달에 발효된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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