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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북한, 보안법 내정간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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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 이영종 정치부 기자

"우리가 노동당 규약을 먼저 고쳐야겠구먼. 곧 7차 당대회를 열어 바꾸겠습니다."

2000년 6월 14일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국가보안법 철폐 요구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동당 규약 전문(前文) 문제를 제기한 데 따른 반응이었다. 전문은 적화통일을 의미하는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 과업 완수'를 명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 당국은 4년 넘도록 최고 지도자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최근 우리의 국가보안법 존폐 논란에 대해 북한은 내정간섭 수준의 막말을 해대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보안법 합헌' 결정 직후인 1일 노동신문은 "시대의 요구와 민심을 거역하는 반민족적 망동"이라고 비난했다. 4일엔 "대화 재개를 바란다면 보안법을 철폐하는 용단을 내리라"고 요구하고 "보안법 폐지를 반대해온 사람은 공화국(북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중단된 당국회담 재개와 보안법 문제를 연계한 것이다. 3~4일 금강산에서 민주노동당과 북한 사회민주당이 접촉했을 때도 이런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북한은 보안법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반(反)통일적 대남전략을 담은 노동당 강령뿐이 아니다. 갈수록 교묘해지는 통일전선전술, 반체제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북한의 법률체계가 가장 확실한 보안법 존재 이유다.

북한은 7월 김일성 10주기 조문과 탈북자 468명의 집단입국을 빌미로 당국 간 대화를 중단시켰다. 이제 와서 거기에 보안법 폐지까지 끌어다 붙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화를 중단시킬 정도로 '엄중한 체제문제'라면 뒷전에서 대북 지원 쌀 40만t을 실은 남한 트럭에 날마다 군사분계선을 열어주는 행동은 뭐라 설명할 건가.

북한이 진정 보안법의 폐지를 바란다면 김정일 위원장의 노동당 규약 개정 약속부터 당장 이행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속사정을 밝히고 남측에 이해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받들고 보안법이 필요없는 남북관계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이영종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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