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바둑 상금랭킹] 세계최강 이창호 8억원 '독보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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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실력의 세계는 하루 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쿠테타 같은 화끈한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매번 서운할 수 밖에 없다.

99년도 국내바둑계는 강자들이 건재했고 노장들은 분투했으며 신인들은 용솟음쳤다. 세계최강의 한국바둑답게 내부는 용광로처럼 들끓었으나 대세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구세대의 투혼에 신예의 기세가 빛을 잃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최강 이창호9단은 올해 5번의 결승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연초 신예강자인 목진석4단과 안조영5단의 도전을 모두 2대0으로 물리쳤다.

명인전에선 최명훈7단을 3대1로 꺾었고 가을의 왕위전에선 2대2까지 가는 박빙의 승부 끝에 유창혁9단을 3대2로 제압했다.

이창호로서는 올해 치른 국내외의 대회 중에서 이 왕위전이 가장 짜릿한 승부였다. 그다음 천원전의 서봉수9단에겐 가볍게 3대0. 세계대회 2관왕인 이창호는 올해 8억여원을 벌어 상금에서도 큰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조훈현9단은 속기전인 KBS바둑왕전에서 이창호9단에게 2대0으로 완승했다. 해마다 사제대결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크게 졌던 조9단이 만47세가 된 올해 국제대회인 춘란배와 속기전에서 연속 승리한 것은 놀라운 투혼이다.

조9단은 '국수' 와 '패왕' 두개의 타이틀을 더 가지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대회들은 연기되어 올해 도전기를 치르지 못했다.

유창혁9단은 배달왕기전에서 조훈현9단에게 3대0 완승을 거뒀다. 그러나 왕위전에 이어 서봉수9단과의 LG정유배에서도 2대3의 쓰라린 패배를 당했다. 여름까지 세계대회인 후지쓰배에서 우승하는등 누구보다 잘 나간 유9단이 가을 이후엔 누구보다도 아쉬운 패배를 많이 당했다.

세계3강이자 한국3강인 이-조-유 세사람 간의 전투에서 적어도 99년만큼은 이창호의 우세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점은 이창호가 비록 막강하더라도 독주는 어렵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상금에선 3억원을 넘긴 유9단이 2억5천여만원의 조9단을 누르고 2위를 차지했다.

멀리 시베리아까지 쫓겨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으로 알려진 서봉수9단이 올해 6년만에 타이틀 홀더로 복귀한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해 50% 언저리의 실망스런 성적을 거뒀던 서9단이 피나는 와신상담 끝에 올해들어 LG정유배를 따내며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이리하여 99년도의 바둑계는 적어도 겉모양으로는 90년대 초반의 '4인방체제' 로 다시 돌아갔다. 승부세계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는 법인데 서봉수가 그 오랜 정글의 법칙을 무너뜨렸다.

올해는 목진석4단과 안조영5단등 20세 안팍의 젊은 신예들이 도전무대에 새롭게 뛰어들어 자라나는 젊은이들의 힘이 정상 근처에 접근했음을 보여줬다. 그들은 상금랭킹에서도 5명이 10위 안에 들었다.

이외에 김만수4단은 신인왕전에서 우승하며 강자 대열에 합류했고 여류대회에선 올해 한국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중국의 철녀 루이나이웨이(芮乃偉)9단이 정상에 올랐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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