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93.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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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13장 희망캐기 28

재를 뿌리기 시작했다. 바닷바람 속으로 온몸을 드러낸 미세한 잿가루는 갈기갈기 흩어져 날았다.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어선 주위를 맴돌거나 선상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태호의 죽음에 모두 일조를 했었던 것처럼 누구나 할 것 없이 사양않고 어선 주위에 재를 뿌렸고, 마지막으로 박봉환이 승희에게 꽃다발 한 개를 건네 주었다.

그녀는 떠내려간 물보라 위로 꽃을 던졌다. 흘리지 않으려 했던 눈물이 또 다시 얼굴을 적셨다. 멀리로 백사장 포구가 희미하게 떠오르는 곳에 이르러서야 승희는 다시 선실로 들어가 앉았다.

박봉환의 아내가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건 비밀인데요. 그 분 중국에서 칼 맞아 죽었대요. " 승희는 대꾸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둘러댔던 방극섭의 말보다 그녀가 슬쩍 흘린 말이 오히려 믿을 만했다. 밀입국에 밀수까지 저지르기 일삼았다면, 칼에 맞았다는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안면도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공허감을 소화하고 용해할 만한 시간을 가졌던 셈이었다.

그러나 승희는 그런 여과의 시간도 갖지 못한 채 그의 죽음과 느닷없이 정면으로 마주친 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확신 없이는 이토록 숙연한 의식을 치를 엄두는 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누가 현장을 본 사람은 없지만, 십중팔구 그래서 죽었다는 얘기를 한선생인가 하는 그 분이 했대요. 그 분도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알아낸 것이랍니다. "

선실에는 키를 잡고 있는 손달근이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손달근이 그녀를 힐끗 돌아보며 면박을 퍼부었다.

"처제, 시방 무슨 얘길 나누고 있는 거유?" "얘긴 무슨 얘기를 했다고 티박부터 줘요?" "기왕 죽은 사람 얘기는 않는 게 좋으니까 하는 소리지. " "나 그런 말 안했어요. 그쵸. 승희씨?"

반죽이 있는 여자란 생각이 들면서 승희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울지 않으려고 웃기를 반복했지만, 자꾸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쉽사리 추스를 수 없었다.

젖먹이가 있다는 핑계로 배를 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박봉환과 잠시 실랑이를 벌이던 것이 생각났다. 그처럼 내키지 않은 걸음을 한 것은 승희에게 쏠리는 관심을 삭일 수 없었기 때문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서 선착장에 당도하기까지 박봉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들 허탈한 모양이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선걸음으로 횟집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엉거주춤한 승희에게 동행할 것을 권유한 사람은 박봉환이었다. 한 여자에게 귀속된, 속되어버린 무기력한 몰골은 바람처럼 떠돌았던 박봉환의 얼굴에도 역력하게 묻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앙증스러운 아내가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달려간 뒤에서야 그녀에게 동행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횟집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술과 안주를 주문했지만, 모두들 게걸스럽게 마셔대진 않았다. 흡사 시신을 바다에 버리고 돌아온 사람들처럼 허탈한 얼굴이었다.

소줏잔을 앞에 두고 손바닥으로 돌리고 있던 승희가 허공을 쏘아보며 한마디 불쑥 내뿜은 것은 그 때였다.

"그래. 이 새끼야, 넌 죽었어. 하지만 난 아냐. 넌 살아 있어. " "승희씨, 그 말 한마디 야그되네. 그래 까짓거, 태호 살아있는 걸로 했뿌러. 어때 박씨?" "그말 맞습니더. 살아 있고 말고요. "

그러나 그의 죽음과 현실적으로 가장 민감하게 맞닿아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손달근의 모가지는 식탁 아래로 자꾸만 기어들고 있었다. 술좌석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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