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이 시들새라 젊음을 반납했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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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지음, 문학과지성사, 115쪽, 6000원

시인 나희덕(38)씨는 변하고 싶다. 다섯번째 시집 『사라진 손바닥』 곳곳에서 변화하려는 나씨의 욕망과 의지가 읽힌다.
시집 첫머리 시인의 말에서 나씨는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 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라고 썼다. 나씨는 껍질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는 관념화된 도덕을 벗어던지고 싶다.

시집 맨 뒷장에서는 존재가 아름다움의 절정에 이른 후 결국 썩고 마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물기를 줄여 서둘러 말려버리는 방식으로 그동안 죽음을 앞당겼다고 토로한다. 아름다운 기억은 보존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젊음을 앞당겨 반납해 버린 것 같다는 반성이다.

이 시집에 실린 50여편의 시 중 ‘풍장의 습관’에 그런 깨달음이 집약돼 있다.

시인은 “책상 위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고 노래한다. 석류와 탱자가 향기를 잃은 사실에 시인이 안심한 이유는 석류와 탱자가 향기 대신 영생을 얻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시인은 싱싱한 꽃이나 열매를 보면 “스스로의 습기에 부패되기 전에/그들을 장사지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때이른 풍장을 지내곤 했었다.

하지만 시의 뒷부분에서 화자는 “누군가 내게 꽃을 잘 말린다고 말했지만 그건/유목의 피를 잠재우는 일일 뿐”이라고 마른 꽃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마른 꽃들은 겹겹의 입술들, 한 번도 젖은 허벅지를 더듬어본 적 없는 입술들을 가진 존재다.

‘마른 물고기처럼’에서 화자는 낡은 밥상 위의 마른 황어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지느러미는 꺾이고 눈도 비늘도 시들어버린 마른 황어가 말인들 건넬 리 없다.

시의 1연은 황어가 말라서 밥상에 오르기 전 어느 겨울 남대천 상류에서 있었던 일을 그렸다.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힘겹게 파닥이고 있었”고, 나는 “얼어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하지만 사실은 나도 두려웠다. 내게 두려운 것은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다.

‘실려가는 나무’에서는 언어에 대한 나씨의 관심이 읽힌다.
또다른 생(生)에 이식되기 위해 머리를 풀어헤친 채 트럭 위에서 흔들리며 실려가는 나무는 입술을 달싹여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나무의 모습을 나씨는 “언어의 도끼가 조금은 들어간 얼굴”로 표현한다. 시인이 자신도 모르게 나무를 따라가며 나무에서 떨어져나온 신음소리를 받아적었던 것은 스스로 언어의 도끼에 다쳐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출토’는 작은 존재들을 놓치지 않는 시선이 돋보이는 시다. 고추밭에서 뜻밖의 수확, 늙은 호박을 발견하고 들어올렸더니 온갖 벌레가 오글오글 매달려 호박을 빨아먹고 있다. 나씨에게는 그 장면이 타닥타닥 불꽃이 이는 소신공양으로 보인다. 가을갈이 때 다시 밭에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고 잘마른 종잇장 하나가 땅에 엎드려 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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