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1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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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5) 귀가 번쩍 뜨일 제안

1974년 12월 초순 어느 날, 국방과학연구소(ADD)에 파견대장으로 나와 있는 주한 美군사고문단 소속의 지안콜라 공군 중령이 나를 찾아왔다.

항공공학 박사인 그를 우리는 그 특이한 이름 때문에 '장꼴라' 라고 불렀다.

그는 같은 공군에다 계급도 나와 같아 개인적으로 평소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레이저 무기를 개발하는지 늘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고, 그러느라 거의 매일 내 방에 들르곤 했다.

그런데 이 날만큼은 평소와는 달랐다.

그는 약간 들떠 있었고 왠지 기분도 좋아 보였다.

"닥터 韓, 좋은 일이 있어요. 방금 전에 '美국방부 고등연구국' (DARPA)에서 연락이 왔어요. DARPA 프로젝트에 ADD가 꼭 참가했으면 좋겠데요. 모처럼의 기회이니 놓치지 마세요. " 나는 귀가 번쩍 띄였다.

DARPA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다니 이게 웬 행운이란 말인가.

만약 미국방부에서 연구비를 타낼 수만 있다면 늘 예산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는 레이저실의 숨통이 확 트일 것 같았다.

DARPA는 57년 10월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닉 1호' 발사에 성공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이 긴급 대응책으로 만든 기구였다.

1백명의 최고 과학자들로 구성된 최첨단 연구 기관이었다.

당시 안보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미국 정부는 이 DARPA를 창설, 새로운 방위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케 했다.

그야말로 미국의 운명이 달린 거국적인 프로젝트였다.

이에따라 DARPA는 세계 주요 대학과 연구소에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방위할 수 있는 개별 연구를 시켰다.

그때 DARPA가 착수한 프로젝트 이름이 바로 '별들의 전쟁' (SDI)이었다.

83년 3월 당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별들의 전쟁' 을 선언했지만 그 준비 작업은 이미 50년대 말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별들의 전쟁' 이란 바로 인공위성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모든 전투상황을 신속하게 수집.종합해 인공위성으로 적을 공격하는 첨단 과학전쟁이다.

이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레이저를 비롯한 광선(光線)이다.

광선을 통해 인공위성간 통신이 이뤄지고 지상에서의 모든 정보가 미국의 방위사령부로 즉각 보고된다.

당시 DARPA에서는 전 세계를 무대로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를 가상해 유럽의 11개 지역과 동양의 1개 지역을 선정, 지역별 광(光)통신 상황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예컨대 날씨가 좋으면 광통신이 원활하지만, 눈.비가 오거나 안개가 낄 경우는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날씨 변화에 따른 광통신 상태를 정확히 측정하는 게 DARPA 프로젝트 가운데 포함돼 있었다.

나는 지안콜라 ADD 파견대장으로부터 이같은 얘기를 전해 듣고 곧바로 레이저실 연구원들을 소집했다.

이들에게 DARPA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예산 문제로 번번이 국방부와 씨름할 게 아니라 아예 나라 밖에서 연구비를 확보하자. 그래야만 우리 레이저실이 살 수 있다. " 내 설명을 들은 연구원들은 마치 먹이를 발견한 사자처럼 눈에서 빛이 났다.

나는 그날 저녁부터 연구원들과 함께 DARPA에 제출할 연구 계획서 작성에 몰두했다.

겨울밤 살을 에이는 바람이 허름한 창문 틈새로 파고 들어와 방안에 한기가 가득했지만 우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연구비를 타 내려는 우리의 집념은 그만큼 강했다.

정확히 두 달 후, 우리는 '광선' 에 관한 3개의 연구 계획서를 완성했다.

ADD에서는 우리 것(레이저실)을 포함, 총 1백개 과제에 대한 연구비를 신청했다.

마침내 75년 5월, 1차 심사 결과가 나왔다.

ADD가 제출한 1백개 과제 중 20개만 선정됐지만 레이저실에서 제출한 3개의 연구 과제는 모두 채택됐다.

너무 기뻤다.

그러나 최종심사가 남아 있는 상태인지라 아직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니었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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