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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칼럼] 보안법 개정의 핵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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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달 북한 노동신문이 '파쇼광의 유치한 기만극' 이라는 제목으로 정부의 언론탄압정책을 격렬히 비난했다.

이 기사가 연합뉴스에 나가자 중앙일보 인터넷 영문뉴스 담당자가 영문으로 번역해 인터넷에 띄웠다.

이 뉴스가 뜨자 중앙일보의 주장을 북한신문에 의탁해 띄운 게 아니냐는 비판이 네티즌 중에서 나왔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데스크가 서둘러 지웠다.

어떤 고의성도 없는 부주의한 해프닝일 뿐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 해프닝을 중대한 '사건' 으로 보고 문제를 다룰 때 어떤 가공할 결과가 나올까.

현행 국가보안법을 여기에 엄격히 적용해 보자. 보안법상 '국가기밀' 이란 '상식에 속하는 공지의 사실이라도 그것이 반국가 단체에 유리한 자료가 되고 우리나라에 불이익을 초래한다면 국가기밀에 속한다' 고 대법원은 판시했다.

이처럼 보안법 4조1항 국가기밀 누설죄를 광범위하게 적용하면 이 법에 저촉된다.

또 보안법 7조 찬양.고무.동조죄에 저촉된다.

북한편을 들어 찬양.동조한 죄로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여기에 동료가 지켜보고도 정보기관에 고지하지 않았다면 보안법 10조 불고지죄에 걸려 5년 이하의 징역을 살게 된다.

지나친 과장이라 할지 몰라도 몇해 전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큰 사건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군사독재시절 이보다 못한 사소한 일로도 숱한 사람들이 간첩죄에 연루돼 고역을 치렀다.

그만큼 세상은 달라졌다지만 예나 지금이나 국가보안법은 그대로다.

늘려서 적용하면 간첩이 되고 그냥 두면 해프닝이 된다.

더구나 나처럼 북한을 네번이나 드나든 사람에겐 공안당국이 걸려고 들면 언제나 걸려들 수가 있게 돼 있다.

남북교류협력법 3조는 "남한과 북한과의 왕래.교역.협력사업 및 통신역무의 제공 등 남북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에 관해서는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안에서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 고 했다.

그러나 보안법 6조는 반국가단체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잠입.탈출한 자에 대해선 엄한 처벌을 할 수 있다.

교류협력법의 '왕래' 와 보안법의 '잠입.탈출' 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를 누가 판단하고 규정할 것인가. 공안당국의 마음먹기에 따라 '왕래' 가 '잠입' 이 될 수 있다.

보안법 개정 논의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세상이 달라진 만큼 법이 달라져 있지 않기 때문에, 교류협력의 대세와 국가안보관련법이 상충하고 있기 때문에, 또 그동안 국가안보차원이 아닌 정권안보차원에서 숱한 생사람들이 간첩으로 둔갑됐기 때문에 개폐론이 대두되는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나는 보안법 철폐보다는 단계적 개정을 요구한다.

남북간 교류협력은 이 정권만의 주요정책이 아니라 2000년대의 시대적 당위다.

때문에 보안법 제2조 반국가단체 정의 중 '정부 참칭' 부분은 삭제돼야 한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 법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 라고 정의했다.

특수관계란 대외적으로는 1민족.2국가, 대내적으론 1민족.1국가.2체제.2정부를 뜻한다.

제한된 국가성을 인정하면서 상호성과 동등성을 부여하고 있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북한은 정부를 '참칭' 하는 단체가 아니라 정부를 '칭' 할 수 있는 '국가' 라는 견해가 현실적이다.

북한을 교류협력의 대상으로 삼는 한, 이 부분 삭제는 당연하다.

문제의 찬양.고무죄는 굳이 표현의 자유를 거론치 않더라도 적용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서 형벌과잉을 초래하는 반인권적 악법으로 꼽히고 있다.

5공시절 보안법 위반자 총2천2백여명 중 2천여명(92%)이, 98년에도 4백여명 중 3백80여명이 7조 위반자였다.

이 법을 고치거나 대체하지 않고서는 세계인권단체들의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폐하지 않고 개정해야 하는 이유는 아직도 간첩을 잡아야 할 현실적 이유가 상존하기 때문이다.

대체형법으로도 충분히 간첩을 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을 모르는 얘기다.

국정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대북정보수집과 관련첩보를 통해 간첩행위자나 혐의자를 포촉할 수 있는 특수기관이기 때문이다.

보안법이 철폐되면 국정원 존재란 있으나 마나다.

간첩이란 내놓고 설치는 범법자가 아니다.

북한이 남파간첩을 시인한 적이 없지만 간첩은 아직도 있을 것이다.

세계 어디도 우리식 보안법이 없다고 하지만 남북대결이 이처럼 첨예한 지역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보안법이란 간첩을 잡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다. 생사람 다치지 않고 간첩 잡는 데만 주력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면 된다.

이것이 보안법 개정의 핵심이어야 한다. 여기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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