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키워드] 7. 잡종성 문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날짐승과 길짐승 어느 편에도 속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박쥐가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는다는 어린 시절에 읽은 우화는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강박관념을 대변한다.

우리는 삶의 여러 국면에서 '소속을 밝혀라' '이편인지 저편인지 분명히 하라' 는 요구에 직면한다.

양쪽을 다 거부하거나 이편인 동시에 저편이고자 하는 사람은 늘 중간자.회색분자.주변인 취급을 받으며 소외되게 마련이다.

따지고 보면 매사에 금을 그어 경계를 정하는 분화(分化)의 과정을 통해 합리화를 추구하는 것은 근대주의의 한 특성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작가와 독자 하는 식으로 다양한 역할과 장르와 영역의 분화를 통해 기능화.전문화하는 것이 능률과 생산성을 높이는 근대적 방식으로 간주돼 왔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분화의 과정은 좀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수천년 단일 민족의 신화를 간직한 한국 사회의 '순수성 이데올로기' 는 어떤 분야에서든 분명한 경계와 확고한 정체성을 요구하는 경직성으로 표현됐다.

예수보다 더 기독교적이고 마르크스보다 더 마르크스주의적이며 공자보다도 더 유교적이기를 요구하는 그 순수성의 이데올로기는 이 사회를 늘 극단적 대립과 갈등으로 몰아간 요인 중 하나였다.

잡종성(hybridity)은 근대주의와 순수 이데올로기 속에서 형성된 양극화의 논리, 대립과 갈등의 세계, 폐쇄적인 편가름과 타자(他者)에 대한 억압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며 21세기 문화의 향방을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이다.

대립적인 두 영역의 중간에서 양쪽을 넘나들며 경계를 낮추는 잡종적 존재는 늘 새로운 창조적 진화를 위한 매개항이 될 것이다.

문화에서 이런 현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돼 왔다.

고전음악과 대중음악, 또는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들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크로스오버가 일반화됐고, 최근 제작되는 많은 영화들은 기존의 장르 관습을 넘나드는 잡종 장르의 속성을 띠고 있다.

상업적인 대중문화와 운동권의 민중문화라는 80년대식의 가파른 이분법은 다양한 중간자들에 의해 이미 무색해졌다.

특정한 영역이나 범주에 구애되지 않는 잡종식 글쓰기는 90년대 문화담론의 특성이다.

학문적으로도 기존의 배타적 영역 구분에 머무르지 않는 이른바 간(間)학문적 또는 학제적(學際的.interdisciplinary) 연구가 강조되고 있다.

디지털 문명은 전통적인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고 작가이자 독자이며 연행자이자 관객인 새로운 문화적 주체들을 만들어낸다.

글로벌화가 진전하면서 이종(異種)문화간의 접합은 더욱 다양한 층 위에서 복합적으로 일어나며, 그 결과 끊임없이 새로운 변종과 그 변종의 변종들이 생겨날 것이다.

잡종성, 혹은 잡종 문화의 존재는 타자에 대한 인정을 통해 조화를 추구하는 디딤돌이자 이원론의 틀에 갇힌 상상력을 해방하고 금기를 타파하는 창조성의 씨앗이다.

물론 대립하는 두 범주 사이에 명백히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응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