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더 총리 제3의 길 노선 이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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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함께 '제3의 길' 을 달리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의 자동차가 좌회전 차로로 방향을 옮겼다.

블레어와는 좀더 간격이 벌어진 반면 '쇄신좌파'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총리의 차 뒤에 바짝 붙었다.

최종 목적지가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정통노선으로의 복귀인가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슈뢰더 총리는 7일(현지시간)부터 사흘간 열리는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기존의 경제정책을 전면 재검토할 예정이다.

슈뢰더 총리는 노동자의 희생이 불가피한 기존의 '중도좌파' 경제정책으로는 국민을 더이상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

올해 실시된 여섯차례의 주의회 선거와 유럽의회 선거에서 모두 패한 뒤 얻은 결론이다.

지난달 열린 사민당 지도부 회의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사회적 형평성을 끌어올리는 정책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는 조스팽의 '쇄신좌파' 이념이 강조하는 대목이다.

슈뢰더는 선거참패 이후 당 내부에서도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전통 좌파들의 공격과 정책수정 요구에 시달려왔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당수로 재신임받음으로써 당내 우파와 좌파간의 노선갈등을 봉합하고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할 필요성이 대두한 것이다.

이에 따라 슈뢰더는 최근 정책변화를 적극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96년 폐지된 '부유세' 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당내 좌파의 주장을 일축하면서도 같은 효과를 거두는 새로운 세제(稅制)를 제안하는 등 좌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취했다.

상속받은 대규모 부동산의 가치평가방식을 현실화, 부유층에 더 많은 세금을 매기자는 것이다.

그가 최근 파산절차에 들어갔던 독일 제2의 건설그룹 필립 홀츠만을 살려낸 것도 분명 시장경제논리에는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 전역을 뛰어다니며 노동자들에게 양보하도록 설득, 홀츠만에 대한 채권은행단의 긴급 자금지원을 이끌어냈다.

독일 통신업체인 만네스만에 대한 영국 보다폰의 적대적 기업합병 시도에서 보여준 슈뢰더의 태도도 '제3의 길' 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독일 기업문화를 강조하면서 적대적 기업합병을 비판함으로써 영국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이같은 슈뢰더의 행동은 기업경쟁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노선보다는 노사합의와 분배정의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 정통노선에 분명 가깝다.

그러나 슈뢰더가 '제3의 길' 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내년초 실시될 주의회 선거와 당내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라는 게 지배적 분석이다.

7만명의 실업자를 낳을 홀츠만의 파산은 그에게 정치적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독일 통신시장의 선도기업을 영국에 넘겨준다는 비난도 감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슈뢰더 총리가 전당대회에서 당수로 재선되는 과정에서 얼마만큼의 지지율을 얻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지난 4월 오스카 라퐁텐이 당수직에서 전격 사퇴함에 따라 당수에 선출된 슈뢰더는 당시 전당대회에서 76%의 지지를 얻어 전후 사민당 당수 선거 사상 최저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정치분석가들은 슈뢰더가 최소 80%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만 당내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훈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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