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광장] 러도 한판 벌이는 '새천년 해돋이 장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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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모스크바〓김석환 특파원]새 천년의 태양은 어디에서 가장 먼저 떠오를까. 2000년이 목전에 다가오면서 "우리가 먼저" 라고 주장하는 나라들의 경쟁이 뜨겁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곳은 남태평양의 키리바시 공화국. 키리바시는 94년 날짜변경선 동쪽에 위치한 피닉스 제도의 시간을 날짜변경선 서쪽의 길버트 제도와 같은 시간대로 통일시켰다.

이에 따라 날짜변경선이 키리바시를 가로지르게 됐고 키리바시는 시간상으로 가장 이른 국가가 됐다는 주장이다. 키리바시측은 97년부터 키리티마티와 캐럴린 섬들을 아예 '밀레니엄 섬' 이라고 개명했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날짜변경선에서 1백55마일 떨어진 채덤 제도에서 새 천년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뉴질랜드 천문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채덤 제도의 피트섬에 위치한 해발 2백31m의 하페카 산에서 새 천년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논쟁이 격화되자 97년 세계 지리학계의 권위지인 '지오그래픽 저널' 이 유권해석을 내렸다. 영국왕립지리학회가 발간하는 이 잡지는 "위도.경도상의 실질적인 위치가 판단 기준" 이라며 뉴질랜드의 손을 들어줬다. 특정 국가의 행정적 편의를 위해 설정한 시간대는 사회적 관념일 뿐이란 결론이었다.

뉴질랜드는 환호성을 질렀고 키리바시는 침묵했다. 하지만 곧바로 반론이 제기됐다. '지오그래픽 저널' 의 집필자 노리스 맥워터가 피트섬에서 벌어질 밀레니엄 행사에 관련된 권리를 사놓은 상태였다는 폭로가 나온 것이다.

물고 물리는 싸움의 와중에 이번에는 러시아가 도전장을 냈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지난 9월 새 천년 맞이 준비회의에서 "새 천년은 러시아의 추코트 반도에서 시작된다" 고 공식 선언했다.

추코트 반도 새 천년 준비위원회는 '추코트 반도 00:00:2000' 이라는 축제를 준비 중이다. 준비위는 2000년 1월 1일 0시에 맞춰 인공위성의 영상 전달 가능을 이용해 날짜변경선 동쪽의 알래스카에서 건너온 1000년대의 인간과 러시아 추코트 반도의 2000년대 인간이 서로 악수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행사도 갖는다.

학계에서도 거들고 나섰다. 러시아 지리.천체 학자들은 "1884년 워싱턴에서 개최됐던 세계 날짜변경선 회의에서 전 세계를 24개의 시간대로 나누면서 추코트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는 지역으로 결정했다" 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특히 사람이 많이 사는 실제 거주개념을 내세우고 있다. 일부에서는 러시아 정교가 새 천년을 맞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서방 기독교계의 음모도 있다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는다.

대부분의 서방 언론들은 키리바시나 뉴질랜드에서 벌어질 새 천년 해돋이 기념 축제를 생중계하기 위해 법석을 떨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일부 이벤트 회사들은 이들 섬에서 벌어질 각종 축제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와 중계방송권을 사 되파는 장사로 눈이 벌겋다.

결국 러시아가 새 천년의 첫 해돋이를 둘러싼 경쟁에 뛰어든 이유도 이같은 밀레니엄 특수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으로 보인다.

새 천년의 해돋이를 둘러싼 갈등은 인류의 새 천년도 지난 밀레니엄처럼 또다시 분열과 갈등의 계속일 것이라는 점을 상징하는 징표일까.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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