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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 야구, 한국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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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운동장에서 직접 야구를 처음 구경한 것은 돈암동 용문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동대문운동장으로 달려가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고교 야구를 관람하곤 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연고지가 대전이었던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를 응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모교 장충고등학교 출신인 양세종 선수가 활약했기 때문이다. OB 베어스가 서울로 입성한 후에는 신촌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조교들과 더러 잠실운동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올해 한국 시리즈가 내게 인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OB 베어스 시절의 감독과 선수가 맞대결한 ‘사제(師弟) 시리즈’였기 때문이다. 사제의 운명적 승부는 결국 기아 타이거즈 감독인 제자 조범현이 우승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SK 와이번스 감독인 스승 김성근도 또 다른 승리자다. 주축 투수와 포수인 김광현과 박경완이 결장했는데도 그는 기어코 7차전까지 끌고 가는 기염을 토했다. 벼랑 끝이었던 6차전에서 3-2라는 아슬아슬한 스코어로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려놓은 김성근 감독은 야신(野神)이라는 별명답게 게임의 완벽한 지배자였다.

이른바 ‘김성근식 야구’가 논란이 없던 것은 아니다. 너무 승부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함이 작지 않다. 야구계의 대표적 격언 중 하나가 ‘사람 좋으면 꼴찌’(Nice guys finish last)다. 1941년 브루클린 다저스 감독으로 메이저리그 우승을 차지한 레오 듀로서가 남긴 이 말은 승부의 비정함을 지적한 게 아니라 승리를 위해선 혹독한 훈련과 냉정한 판단이 요구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내친김에 야구 얘기를 좀 더 하면, 우리 야구에도 이제 전통이라는 게 확립돼 가는 것으로 보인다. 기록을 중시하면서도 때론 감을 신뢰하는 조범현 감독의 야구도 스승 김성근 감독의 데이터 야구에 기반해 독자적인 스타일을 일군 사례다. 9회 말 나지완의 홈런으로 고교 시절부터 은사였던 김성근 감독을 극적으로 넘어선 조범현 감독은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게임이 끝나자 상대팀 더그아웃으로 찾아가 모자를 벗어 김성근 감독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조범현 감독의 모습은 치열하지만 아름다운 승부의 세계를 생생히 보여줬다.

다른 스포츠와 비교해 야구는 감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 선발투수와 타순 결정이 그러하며, 투수 교체 타이밍은 게임의 분수령을 이룬다. 이길 게임과 버릴 게임을 과감히 결정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선 예기찮은 심리전에 대비해야 한다. 개별 선수들이 갖는 능력의 합이 팀의 1차 역량이라면, 이 역량을 유기적으로 조합하는 감독의 능력을 더한 것이 팀의 최종 역량을 이루는 게 다름 아닌 야구다.

바로 이 점에서 야구 감독의 리더십은 정치가의 리더십과 매우 유사하다. 전체 흐름을 염두에 두면서 부분 전략을 구사해야 하고, 희생적인 리더십과 자발적인 팔로어십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목표에 대한 뚜렷한 비전, 그리고 리더와 멤버 간의 신뢰가 더없이 중요하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리더십의 전통과 혁신이다. 김성근 감독의 치밀한 리더십은 조범현 감독에게로, 김인식 감독의 선 굵은 리더십은 김경문 감독의 리더십으로, 창의적으로 변용돼온 것에 반해 정치적 리더십의 전통과 혁신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앞선 리더로부터 교훈을 얻는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고 자기의 색깔만을 강조해온 게 우리 정치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말은 리더십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대표해온 박정희 리더십과 김대중 리더십에도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 보수든 진보든 앞선 리더들의 단점은 과감히 극복하되 그 장점은 창의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선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를 열기 위해서는 새로운 비전이 요구되며, 이 비전은 무엇보다 새로운 리더십을 통해 구체화되고 실현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산업화 30년, 민주화 20년의 역사적 무게를 생각하면 이제 우리 정치도 리더십의 전통을 가질 때가 됐다. 그리고 그 전통 위에서 우리 사회 미래를 새롭게 조타해 나갈 혁신의 리더십을 일궈내야 한다. 전통을 존중하고 혁신을 모색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정치적 리더십을 지금 우리 사회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 정치는 우리 야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