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프랑스, 대서양만큼 먼 문화적 차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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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로만 폴란스키(76)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았을 때 매우 실망한 기억이 있다. 영화가 별로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가 너무 좋아 화가 났다. 이렇게 감동적인 휴먼드라마를 만든 사람이 미성년자 강간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니, 게다가 수십 년간 벌을 받기는커녕 온갖 영화제에서 상이란 상은 다 휩쓸고 다니고 있다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싶었다.

그런 그가 지난달 영화제 참석차 스위스에 들렀을 때 공항에서 전격 체포됐다. 사건 발생 32년 만의 일이다. 그는 1977년 당시 13세의 미성년자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던 중 프랑스로 도주했다(그는 폴란드와 프랑스의 이중국적자다). 프랑스와 미국 간에 체결된 범죄인도조약에 따르면 범죄인이 자국민일 경우 신병 인도를 거절할 수 있다.

그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미국으로 송환되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계산에서 최근 스위스 현지 법원에 보석을 신청했다가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는 당시 성관계가 동의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강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재판을 받게 될 캘리포니아주는 18세 이하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를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무조건 금하고 있다.

신기한 것은, 사필귀정이라고 생각되는 이번 일이 프랑스에서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체포 직후 프랑스 언론과 지도층은 스위스 경찰과 미국 사법체계를 맹비난하고 나섰다. 심지어 사르코지 대통령도 최근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고령의 범죄자가 32년 전에 저지른 일을 이제와 들추는 것은 적절한 법 집행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폴란스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가령 그가 체포된 것은 지난해 그가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미국 검찰이 사건 발생 당시 권력을 남용했다”고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한 정치적 보복이라는 주장이다. 또는 이번 일이 스위스와 미국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최근 미국 정부가 “스위스 은행이 미국인의 조세 포탈을 방조한다”고 비난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은 이러한 프랑스의 반응에 적잖이 의아해하는 눈치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폴란스키 감독의 체포를 둘러싼 공방은 양국 간의 문화적 차이가 여전히 대서양만큼이나 넓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논평했다. 죄질이 불량한 아동 성범죄자를 프랑스 사회가 이토록 비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한 인터넷 언론은 폴란스키가 갖는 상징성을 이해해야만 그 의문을 풀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사회는 폴란스키를 타락하고 무질서한 유럽문화의 전형으로 인식하는 반면 프랑스 사회는 예술을 이해 못하는 문외한들, 특히 ‘천박한’ 미국인들에 의해 무시당해온 유럽 예술의 전형으로 본다는 것이다.

게다가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홀로코스트를 견뎌낸 그는 ‘암울했던 과거를 극복하고 부흥을 이룬 유럽’의 모습을 상징하기 때문에 프랑스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미국의 어떤 조치도 박해나 억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분석한다. 그 결과, 폴란스키 사건에 대한 공방은 법적 사실관계보다 양국 간의 문화적 반감을 반영하게 됐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이들 가지고 장난치는 자는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인지라 그가 체포된 배경에 설령 3차 세계대전의 정치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체포는 정당하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동의 인권은 문화나 이념의 차이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일간지에서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유학하고 있다. 음악과 문화 등 대중문화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다.

sisikolko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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