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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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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정희 대통령 시대 이래 44년간 한국 경제는 용하게 잘도 커왔다. 호황의 들뜸도 있었고 불경기의 침울함도 있었다. 이제 열번째 경기순환의 파도를 타고 있다고 한다. 파도의 높낮이는 다르지만 높고 낮은 꼭짓점이 다섯번씩 있었다는 것이다. 삶을 책임있게 살아 온 40대 중반의 인생 굴곡과 비슷하다.

최초의 꼭짓점은 대일 청구권 자금과 월남전 특수에 힘입은 1967~69년이었다. 중동건설의 불꽃이 타올랐던 76~78년엔 팽창하는 국부(國富)가 대견스러웠다. 외채 망국론을 잠재운 86~88년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었다. 93~95년은 엔고(円高)에 반도체 수출이 겹쳐 행복했고, 2000~2002년엔 외환위기를 이겨내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완성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 사이에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에서 1만달러로 120배 증가했다. 우리가 80달러일 때 북한은 120달러, 필리핀은 160달러, 아르헨티나는 1300달러였다. 그들은 주저앉거나 제자리에서 맴돌았지만, 우리는 풀뿌리를 캐먹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던 옛일을 잊을 정도로 성장했다. 지금 좀 어렵다고 하지만 한국 경제의 힘과 저력까지 의심받을 처지는 아니다.

따져 보면 호황 뒤끝의 하강 국면이 걱정스럽고, 회생할 수 없을 것 같은 침체의 바닥에서 절망을 느껴야 했던 기간이 더 길었다. 신군부가 등장하거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던 때의 마이너스 성장기를 포함해 그런 시기는 30년 가까이 된다.

이런 걱정과 절망의 현실을 견뎌낸 힘은 정신에 있었다. 성취의 보람을 맛봤던 과거의 기억과 좋은 날이 올 것이란 희망, 여기서 무너질 순 없다는 오기 같은 정신이었다. 이런 힘은 때론 대통령의 리더십에서, 어떨 때는 관료와 학자의 헌신성에서, 다른 시기엔 기업인의 모험정신에서, 종종 노동자.자영업자의 신바람과 부지런함에서 나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한국 경제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발산한 위기극복의 노하우는 경제 주체들이 지닌 이런 정신이었다. 얼마 전 열린우리당 경제 토론회에서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가 "경제에선 사실보다 인식과 느낌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새삼 현실보다 현실을 대하는 정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