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숙씨 문건 미스터리] 문건출처 어디든 국가정보 보고망 구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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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옷 로비 사건과 관련, 배정숙(裵貞淑.강인덕 전 통일부장관 부인)씨가 지난 1월 사직동팀 보고서로 추정되는 문건을 자신에게 건네준 게 연정희(延貞姬.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씨였다고 22일 폭로함에 따라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고관 부인들이 옷 로비를 받았느냐 아니냐, 위증을 했느냐 아니냐와는 별개로 대체 이 문건의 정체가 무엇이며, 어떤 경로를 거쳐 여인네들 손에까지 들어갔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1차적인 관심은 '이 문건이 뭐냐' 는 것이다. 관련자들의 진술이 너무 엇갈리기 때문이다.

청와대 박주선(朴柱宣)법무비서관은 문건이 공개되자 "문건은 사직동팀 보고서가 아니다" 고 재차 부인했다. 지난 17일 최병모(崔炳模)특별검사팀이 "사직동팀 최초 보고서로 추정되는 문건이 압수됐다" 고 발표한 데 대해 "사직동팀 최초 보고서라는 건 있지도 않다" 고 반발한 데 이어 두번째다.

朴비서관은 몇가지 증거를 들었다. 그는 "공개된 문건 상단에 '조사과 첩보' 라고 볼펜 등으로 쓰여 있으나 사직동팀 양식에는 그런 게 없다" 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난 1월 21일 무렵이면 사직동팀의 내사가 사실상 끝난 상태여서 다른 수사기관에서도 그 정도 내용은 알았을 수 있다" 고 말했다. 그러나 이 경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문제의 문건이 사직동팀에서 작성됐다면 우선 김태정(金泰政) 당시 검찰총장이 사직동팀 관계자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아 延씨에게 줬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문건이 사직동팀이 작성한 게 아니라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누군가 제3자가 사직동팀의 기초 문건을 토대로 재작성해 金전총장에게 건넸다는 시나리오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공개된 문건은 정확성이나 문구 등으로 봐 사직동팀에서 진술한 내용을 토대로 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는 수준의 것이다. 하지만 延씨가 이 문건을 裵씨에게 건넸다는 지난 1월엔 옷 로비 사건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사람이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당시 사건의 내용을 어렴풋이나마 알았을 개연성이 있는 조직은 국가정보원과 검찰.경찰 정도였다. 또 문건이 청와대로 보고됐을테니 청와대의 일부 비서관도 읽어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朴비서관의 주장이 옳다면 이 문건은 검찰이나 경찰 혹은 청와대 쪽에서 흘러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金전총장이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실세 총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누군가가 사직동팀의 보고서를 입수.가공해 金전총장에게 건네줬을 가능성이 있다.

또 검찰 조직이 움직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도 자체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이 있고 경찰과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자기 기관의 장(長)이 관련된 만큼 경찰에서 받은 정보를 토대로 이를 재작성해 총장에게 넘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희박하기는 하지만 延씨가 남편인 金전총장 모르게 문건을 받았을 수도 있다. 만일 사직동팀에서 문건을 바로 넘겼거나, 검찰 내부에서 재작성한 것이라면 金전총장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延씨를 잘 아는 사람이 직접 건네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이런 사실은 국가기관의 정보보고 시스템에 엄청난 구멍이 뚫려 있었음을 의미한다.

대통령이 보는 문건을 사건 당사자들이 함께 읽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책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전망이다.

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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