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박사’식지 않는 시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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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조혈모세포이식을 통한 백혈병 치료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시인인 김춘추(65·사진)씨가 7번째 시집 『등대, 나 홀로 짐승이어라』(솔)를 냈다. 모교이자 교수로 몸담았던 가톨릭 의대 정년퇴임을 시집 출간으로 자축한 것이다. 『요셉병동』『聖오마니!』 등 기존 시집에서 가려 뽑은 시편에 신작 시를 합친 60여 편이 실린 시집이다.

8월 말 퇴임한 김씨는 곧바로 9월 초부터 제주 한라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백혈병 치료에서 황무지나 다름 없는 제주도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여러 곳의 러브콜을 물리치고 선택한 결과다.

김씨가 24일 서울을 찾았다. 오후 종로1가 교보문고에서 진행된 독자사인회 행사에 참석했다. 얼굴이 잘 알려진 ‘스타 문인’은 아니지만 김씨의 이력을 알고 있는 독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수백 권의 시집이 팔려나갔다.

그는 “몸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마약인 엔도르핀을 샘솟게 한다는 점에서 백혈병 수술 성공과 좋은 시 한 편 쓰는 일은 비슷하다”고 말했다. “마라톤 주자가 42.195㎞를 완주할 수 있는 이유 역시 17㎞쯤 달렸을 때 나오는 엔도르핀 때문인데 시를 쓸 때 그런 효과가 난다”는 것이다. 또 “의학 논문을 쓰는 일이나 시 쓰는 일이나 상상력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닮았다”고 말했다.

“제주도에서도 좋은 시를 쓰실 것 같다”고 하자 김씨는 “시는 병적으로 온다. 지금 내 머릿속은 제주도 백혈병에 관한 생각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시 쓸 여유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라병원 백혈병 센터가 자리 잡으면 한라산 같은 좋은 경치가 시가 쏟아지게 하는 방아쇠 역할을 할 것 같다”고 했다. 천상 시인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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