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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모의 마술, 발효 온도에서 최적의 맛을 찾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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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호 20면

서울탁주 시흥공장의 한 직원이 컴퓨터 설비를 이용해 막걸리 제조공정을 살펴보고 있다. 최정동 기자

예전 막걸리는 사발에 따라 놓으면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왔다. 아직도 발효 중이라는 표시였다. 맛은 시큼하고 텁텁했다. 트림이 나오기 일쑤였고 자고 나면 머리가 아파 고생도 했다. 강제로 숙성시킨 효모를 사용한 탓이다.

막걸리의 과학 제조공정에 쓰이는 첨단기술들

요즘 막걸리는 달라졌다. 빛깔이 우유 같고 뒤끝이 깨끗하다. 소위 신(新)막걸리다. 신막걸리는 지난해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막걸리 붐을 일으키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런 신막걸리의 탄생은 수십 년 전부터 막걸리 제조·유통·판매 과정에 하나둘씩 쌓인 기술 혁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노력이 소비자의 입맛을 붙잡은 것이다. 지금까지 막걸리 기술 혁신은 국내 최대·최고 탁주제조업 단체인 서울탁주제조협회가 주도해 왔다. 최근에는 전통주 분야의 강자지만 막걸리 제조 분야에선 후발 주자인 국순당이 가세했다. 두 업체의 기술연구소를 찾아 막걸리에 숨어 있는 과학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막걸리 관련 기술 개발은 용기의 변천사와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

“제가 서울탁주에 1974년 입사했고 이듬해부터 막걸리 담는 병 개발을 시작했어요. 용기 개발이 막걸리 과학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죠.” 36년째 기술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성기욱(62·전무) 서울탁주연구소장의 말이다. 최근 서울 도봉구 창동 서울탁주 도봉제조창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첫 작품으로 78년 내놓은 1L들이 PE(폴리에틸렌·나중에 페트병으로 발전)병을 꼽았다. 당시엔 양조장에서 2000L 탱크로리를 탑재한 삼륜차로 실어 시중에서 한 말(20L)들이 통에 담아 팔던 시절이었다. 1L 통의 단점은 용기 안에서 술이 자연 발효돼 탄산가스가 폭발하거나 맛이 변하는 것이었다. 폭발을 막기 위해 마개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 유통시키는 편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80년대 중반 부직포를 댄 마개를 개발하면서 해결됐다. 부직포 마개의 개발은 술이 새지 않고 용기 안에서 발효되는 가스만 빠지게 한 것으로, 소비자들이 막걸리를 집 안의 냉장고에 넣고 보관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탁주는 이 기술의 특허를 갖고 있다.

막걸리를 발효시키는 효모를 죽인 살균주가 등장한 것은 90년대 초, 캔 용기가 개발되면서다. 캔은 지방에서 먼저 사용됐다. 서울에선 국순당이 ‘바이오탁’이라는 이름의 살균주를 처음 내놨다. 그러자 서울탁주도 96년 캔에 담은 ‘월매막걸리’를 선보였다. 막걸리 맛을 내기 위해 탄산을 넣었다가 이것 역시 특허를 받았다. 성기욱 연구소장은 “대부분의 사람은 캔 막걸리가 최근에 개발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며 “13년 전에 개발된 제품이란 걸 알면 놀란다”고 말했다.

막걸리 맛이 균질해진 것은 생산의 자동화, 즉 제조 공정의 과학화 덕분이었다.
“막걸리 제조법은 예전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제조 방식은 현대화됐다. 과거엔 막걸리 제조 공정 모두를 사람이 했다. 균 배양자가 누구냐에 따라 술맛이 들쑥날쑥했다. 지금 서울탁주는 시흥에 있는 통제실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제어한다. 온도·수분 등을 입력시킨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으로 돌아간다. 현대적 설비를 이용해 과학적으로 품질 관리를 하니 품질이 균일할 수밖에 없다. 7개의 제조창에서 나오는 술맛이 비슷해졌다는 것이다.”

과거 일꾼이 밤을 새워 가며 작업장에서 밥을 찌고 푸고 밟던 일은 드럼식 증자기가 대체했다. 증자기 안에서 쌀을 불리고 물을 빼고 냉각시키는 게 전부 이뤄지면서 위생적인 품질 관리가 가능해졌다. 질 좋은 입국(‘고지’라고 불리는 일본 누룩)을 대량 생산하는 쌀 전용 자동 제국기가 도입된 것도 92년이었다. 당시 1세트(2대)에서 시작한 것이 현재 9세트(18대)로 늘었다. 주문이 폭주한 올해만 4세트가 늘었다.

발효 온도의 마술도 작용했다. 70년대 초만 해도 “따뜻해야 술이 잘 고아진다”고 해서 발효 적정 온도를 섭씨 36도로 잡았다. 그러나 온도가 높으면 효모균이 약해지는 대신 초산균이 세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술의 질이 안 좋아지고 초산 발효로 인한 사고도 발생했다. 현지 공장장들에게 이런 문제를 얘기하며 발효 온도를 낮추라고 했지만 개선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발효 온도를 2도 낮추는 데 평균 2년이 걸렸다. 현재의 25~26도로 낮추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저온 장기 발효를 하면서 술맛이 개선됐다.

제조법도 전통 방식과 다르다. 전통 방식은 통밀을 갈아 물과 섞은 뒤 15~20일간 자연 발효시킨 누룩을 발효제로 사용한다. 서울탁주는 쌀에다 균을 넣어 배양한 것을 입국으로 사용한다. 누룩은 그 향과 맛을 느낄 수 있을 만큼(전체 원료의 2.3%)만 넣는다. 현대식으로 개량한 것이다. “전통을 중시한다면서 누룩을 이용해 술을 만든다고 좋은 게 아니다. 누룩을 많이 쓰면 냄새가 많이 나고 약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다.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 맞다.”

‘백세주’로 유명한 국순당은 초창기 약주와 함께 막걸리도 생산했다. 93년 살균주인 캔 막걸리 ‘바이오탁’을 내 놨지만 시장이 외면했다. 2000년대 들어 막걸리 시장이 커지고 발전 가능성이 보이자 재진입했다. 2005년 시작해 3년 연구 끝에 개발한 게 발효 제어 기술이다. 생막걸리가 유통 기한이 짧아 전국 유통이 안 된다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발효는 효모와 유산균 간의 세력 싸움이라는 점에 착안, 시중에 유통되는 병 안에서 원하는 정도만큼 발효한 뒤 발효를 중지시키는 기술이다. 완전 밀폐가 가능한 마개를 사용한다. 이를 통해 생막걸리의 유통 기한을 통상 10일에서 1개월로 확대시켰다. 생막걸리의 해외 수출길을 연 것이다. 이 기술을 적용해 올 5월 출시한 것이 국순당 생막걸리다.

업계 최초로 냉장 유통 시스템도 갖췄다. 막걸리가 공장에서 나와 소비자에게 유통되는 전 과정에서 냉장 상태로 유지되도록 유통업체들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에 따라 막걸리는 이마트 등 유통업체 진열장 주류 코너에서 냉장 코너로 옮겨져 팔리고 있다. 우유를 사던 주부가 막걸리를 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또 쌀을 찌지 않고 생쌀로 발효하는 이른바 ‘생쌀 발효 기술’도 개발했다. 연구 결과 쌀을 증자한 양조주에 비해 인체에 필요한 필수 아미노산이 두 배 이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신우창(41) 국순당연구소 부소장은 “생막걸리 발효 제어 기술은 막걸리 세계화의 물꼬를 튼 것이라고 자부한다”며 “막걸리에 숨어 있는 과학기술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한국의 술 막걸리가 세계의 술이 되는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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