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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안중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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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호 34면

역수(易水)는 얼마나 차가웠을까. 자객 형가(荊軻)가 연나라 태자 단의 배웅을 받는 자리에서 이렇게 읊조렸으니 말이다.

강민석 칼럼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구나
대장부 한 번 떠나면 다시 오지 않으리.”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한 자루 비수를 품고 진시황을 암살하러 떠나는 형가가 유명한 ‘역수가(易水歌)’를 남긴 게 기원전 227년의 일이다.

100년 전 오늘. 10월 26일의 하얼빈 거사를 하루 앞둔 안중근도 형가의 심정이었나 보다. 그는 형가의 역수가에 화답이라도 하듯 좁은 방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차가워오니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안중근이 거사 전 남긴 ‘장부처세가’의 일부다. ‘역수가’와 ‘장부처세가’.
사지(死地)로 떠나는 대장부들의 기개와 비장함이 뜨겁게 묻어난다. 다시 못 올 길인 줄 알면서, 혼자 힘으로 결코 역사의 물길을 돌려놓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두사람 모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형가는 ‘대장부 한 번 떠나면 다시 오지 않으리’라 했지만, 안중근은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라 했다. ‘자객 형가’와 ‘안중근 장군’은 일의 성사에 대한 믿음이 달랐던 것 같다.

결국 형가는 진시황의 옷깃을 베는 데까지만 성공했고, 안중근은 세 발의 총알을 이토의 몸에 명중시켰다.

안중근이 명중시킨 것은 세 발의 총알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거사의 이유로 밝힌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는 제국주의의 심장에 그대로 꽂혔다.

명성황후 시해죄, 고종황제 폐위죄,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 강제죄, 한국인 학살죄, 정권 강탈해 통감정치 한 죄, 철도ㆍ광산ㆍ산림ㆍ농지수탈죄, 민족교육 방해죄, 한국인 유학을 금지시킨 죄, 교과서 압수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한 죄, 한ㆍ일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속인 죄, 대륙 침략으로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위선과 거짓투성이였던 일제의 나신은 그렇게 드러났다. 세상에 어떤 대의명분이 더 필요하겠는가.

바로 안중근을 한낱 자객이나 킬러, 테러리스트와 비교할 수 없는 이유다.

안중근 스스로 법정투쟁을 통해 누누이 강조한 점이기도 하다.

1910년 2월 뤼순의 일본 관동도독부 법정. ‘피고 안중근’은 당당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의병 중장’(中將)의 자격으로 한 것이지 결코 ‘자객’으로서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므로 나를 처벌하려거든 국제 공법에 의해 다스려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바로 이토를 저격할 당시의 안중근이었다.

이토를 저격하기 1년 전인 1908년 봄 연해주 일대에서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국 의군이 창설된다. 의군 창설을 주도한 안중근은 그해 7월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국내 진공에 나섰다.

안중근이 이끄는 의군은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고을에서 일본 군경과 세 차례의 교전 끝에 50여 명을 사살했고, 그대로 일군의 주요 기지인 회령으로 진격해 3000여 명의 일본수비군을 격퇴했다.

비록 정예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밀려 본토 진공작전은 패배로 끝났지만, 안중근이 남긴 출사표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이 진공작전의 연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들이 한번 거사로써 성공할 수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첫 번에 이르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열 번에 이르고, 백 번 꺾어도 굴함이 없이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한 다음에라야 말 것이다.”(뤼순 감옥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 중, 응칠은 안중근의 자)

요즘 하얼빈의 안중근 학회와 국내의 안중근 청년아카데미 같은 단체들이 ‘안중근 의사’ 대신 ‘장군’이란 호칭을 쓰자고 주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안중근 장군’이라 부르자는 데 한 표 던지고 싶다. 뤼순 감옥에서 ‘의병 중장 안중근’이 쓴 유묵(遺墨) 가운데 하나도 ‘위국헌신 군인본분’이었다. 무명지 한 마디가 없는 왼손바닥을 낙관 대신 꾹 눌러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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