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59. 오프 더 레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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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59. 외교무대 퇴장

66년 12월 20일, 나는 유엔본부(뉴욕)에서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고 있었다. 그때만해도 남북한은 유엔총회 때마다 한국문제 총회 상정을 놓고 표대결을 벌이는 게 연례행사처럼 돼 있었다.

그런 때문인지 미얀마 출신인 우 탄트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번에도 북한을 배제하는 한국측 입장이 지지를 받았지만 언젠가는 한국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고 내게 말했다. 그 말은 내 가슴에 못을 박는듯 했다.

그렇다. 64년 12월 서독방문 때 나는 동.서독 모델을 설명하면서 朴대통령에게 한국도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는 두 개의 한국정책(two Korea policy)을 채택해야 한다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유엔 동시가입으로 북한을 유엔에 끌어 들이면 언젠가 협력도 이뤄질 테고 '두 개의 한국' 이 '하나' 가 될 날도 올 겁니다. " 그러나 朴대통령은 "독일은 독일이고 한국은 한국. 통일보다 급한건 빈곤탈피" 라며 결사반대였다.

그후로도 몇차례 건의해 봤지만 "괴뢰정권을 인정할 수는 없다" 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차 우 탄트가 다시 나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었다.

울적한 마음에 나는 그날 저녁 수행 기자들과 호텔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물론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를 전제로 평소의 소신을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북한의 실체를 부인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통일에 백해무익하다.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놓고 제3국에 돈 보따리나 싸들고 다니는 비생산적 외교는 이제 지양돼야 한다. 유엔에서의 남북대결은 외교적인 해결이 아니라 국내 정치용에 불과하다. 이젠 북한을 유엔에 적극 끌어 들이는 '두 개의 한국정책' 을 써야 한다. "

그러나 '오프 더 레코드' 는 다음날 국내 신문의 1면 주요기사로 일제히 보도되고 말았다. 기사의 논조들도 마치 외무장관이 항명(抗命)이나 한 것 처럼 돼 있었다.

그러자 평소 나와 견원지간(犬猿之間)이던 김형욱(金炯旭)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에게 달려가 "이동원이가 유엔에서 북괴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빨갱이 아니냐" 며 나의 장관직 해임을 건의했다는 것이다.

유엔 정치위윈회 연설을 하루 앞둔 23일. 김용식(金溶植.전 외무장관.작고)유엔대사가 "본국에서 급전이 왔는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전문을 봤더니 '모든 공식 스케줄을 취소하고 귀국하라' 는 지시였다. 2년 6개월 동안 오직 앞만 보고 달려 온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해외 출장중에 말이다. 순간 나는 마음을 정리하고 예정된 연설도 金대사에게 미뤄 버렸다. 그랬더니 그는 "해외출장중인 장관을 경질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연설을 강행해야 한다" 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유엔 정치위 연설을 내가 하게 됐는데 그것이 나의 '마지막 연설' 이었다.

숙소로 돌아 왔더니 해임소식을 들은 러스크 국무장관이 "무조건 워싱턴으로 오라" 며 내게 전화를 했다. 성탄 전야인 24일 워싱턴 공항에는 러스크, 번디 차관보 부부까지 나와 있었다.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열린 만찬에서 번디는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날 밤 늦게, 이번엔 백선엽(白善燁)캐나다 대사가 전화를 걸어 왔다. "마틴 외무장관이 귀국하기 전 꼭 다녀 가도록 워싱턴으로 특별기를 보냈다" 는 것이었다.

귀국길에 캐나다를 들렀다. 마틴 장관이 베푼 오찬에는 피어슨 수상도 나와 있었다. 57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바 있는 그는 연설에서 '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고 새로운 희망을 성취한 장본인' 이라며 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66년 연말, 어둠이 깔린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이후락(李厚洛)비서실장이 나를 맞았다. 그는 "대통령이 미안해서인지 공항영접을 지시했다" 며 나를 위로했다. 패기 하나로 밀어 붙여 온 격동의 외교 현장이 쓸쓸한 서울 야경과 함께 주마등 처럼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젊은 한국을 위해 내 젊음 다 바쳤으니 정녕 후회는 없었다.

이동원 전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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