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정치 새바람] 상. 정치활성화 박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일본 정치에 대한 대수술이 진행 중이다. 정책은 관료에게 맡기고, 정치헌금이나 챙기며 파벌끼리 자리를 갈라먹는 기존 정치행태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금융개혁.행정개혁에 이어 지금 일본에는 정치개혁이 최대 화두로 등장했다. 우선 관료위주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정치 우위로 바꾸고, 정치의 투명성 제고에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여야 당수간의 1대1 토론과 정무차관의 실세화(實勢化)가 제도화됐으며 정계에 전문가를 수혈하기 위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도 도입됐다.

다선(多選)과 파벌위주의 정치판도도 변모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총리 직선제를 주장할 정도로 정치개혁의 성역은 파괴되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활성화를 통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로 탈바꿈시켜보자는 것이다.

정치개혁의 산물로 10일 실시된 일본 국회의 여야 총재 1대1 토론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정치개혁을 한다면서도 정쟁과 당리에만 매달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 정치권에 적잖은 시사점을 안겨준 사건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선 어떻게 정치개혁이 진행 중인지 시리즈 3회를 통해 알아본다.

10일 TV로 생중계된 일본 국회의 첫 여야 총재토론은 일본 국민들에게 신선함을 던져줬다. 당초 기대했던 것보다는 긴박감이 덜하고 내용도 알맹이가 없었다는 평이지만 그래도 정치 지도자들이 펼치는 실질정치 무대를 지켜보며 국민들은 정치개혁의 가능성을 보는 것 같았다며 박수를 보냈다.

총리는 관료가 써준 답변을 읽는 '대독(代讀)총리' 가 아니었다. 오부치는 한때 쩔쩔매기도 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밝혔다. 미리 전달받은 질문서와 관료가 써준 답변을 읽어가는 예전의 국회가 아니었다.

언제 폭탄발언, 실언이 터져나올 지 모른다. TV카메라 앞에서도 꾸벅꾸벅 졸던 의원들의 모습도 사라졌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총재토론은 질문을 위한 질문과 형식적 답변으로 제기능을 잃어 온 국회의 본래 모습을 복원시키는 계기가 됐다" 고 평가했다. 정치인 주도의 정치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본 정치의 새 바람은 이것만이 아니다. 지난달 29일 열린 임시국회부터는 "담당 국장이 대신 답변하겠다" 는 낯익은 장면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국장급 관료가 국회 답변에 나서는 정치위원회제도가 폐지됐기 때문이다.

9일의 후생위원회에서는 각료가 야당의원의 질문을 추궁하는 장면도 있었다. 각료.정무차관한테도 반론권이 주어진 것이다. 각 상임위 의석도 여야가 마주 보거나 서로 둘러앉도록 꾸며진다. 당초 의석은 당수 토론을 벌이는 예산위원회만 재배치키로 했었다.

자민당 관계자는 "지금까지의 국회 의석 배치는 학교 교실형" 이라며 "대다수 의원들은 원탁형.대면형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고 말했다.

정부위원회 제도 폐지, 각료의 반론권은 새 정치문화도 몰고 왔다. 대다수 의원들은 서류를 싸들고 집으로 돌아가 머리를 싸맨다. 그렇지 않아도 각종 부회.조사회 활동을 위해 조찬 토론으로 시간을 쪼개온 그들이다. 국회 답변을 해야 하는 정무차관은 눈코 뜰 새가 없다. 각료와 마찬가지로 부처의 모든 상황보고를 받는다.

정책결정 시스템도 2001년부터는 바뀐다. 지금은 과장, 실.국장이 정책을 입안해 사무차관.정무차관을 거쳐 각료한테 보고한다. 정치인 출신의 정무차관과 각료가 있지만 사실상 관료의 손에 놀아났다.

그러나 2001년부터는 사정이 다르다. 중앙부처에 지금보다 많은 의원이 포진한다. 초선~2선 의원이 국장.심의관의 정무관을 맡아 정책을 짠다. 관료출신 사무차관과 같은 급인 정무차관 직책은 없어지고 사무차관보다 높은 부(副) 대신 직책이 신설된다. 관료 최고직이 서열 3위로 되는 셈이다.

정치인이 정책을 입안하고 책임을 지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새 제도는 의원들의 질을 높이는 상승효과도 가져다 줄 전망이다. 정치권의 개혁은 관료와의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극단적인 정치불신 속에서 정치인 모두가 공멸한다는 위기감이 그 모태다. 일본 정치권은 한꺼풀씩 구각을 깨뜨리고 있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