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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무대 몇 년째 ‘그 나물에 그 밥’…“공연 수준은 선진국, 레퍼토리 수준은 후진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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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 ‘동화’ ‘정치적 작품’ 등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한국에서는 ‘어린이 오페라’로 반복 공연되는 작품이 됐다. [중앙포토]

다음달 19~22일, 서울시오페라단은 베르디의 ‘운명의 힘’을 무대에 올린다. 사랑과 복수가 얽힌 삶을 장대하게 그린 이 작품은 서곡으로 특히 유명하다. 금관 악기의 불길한 화음으로 시작하는 서곡은 오케스트라의 단골 연주곡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앨범에도 들어갈 정도의 서곡을 가진 ‘운명의 힘’. 그러나 한국 공연은 19년 만이다. 서울시오페라단의 전신인 서울시립오페라단의 1990년 공연이 마지막 기록으로 남아있다.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대표곡으로 유명한 오페라 작품 벨리니의 ‘노르마’도 마찬가지다. 지난 6월 이 작품은 21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아왔다.

왜 이렇게 유명한 작품들을 다시 보는데 20년씩 걸린 걸까. 답은 간단하다. 국내에선 만날 똑같은 레퍼토리만 반복되고 있어서다. 본지가 전국 10개 공연장을 조사한 결과 지난 3년 동안 가장 많이 공연된 다섯 편의 작품이 전체 공연 횟수의 약 42%를 차지했다. 1위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다. 총 135번의 전국 오페라 공연 중 16번을 차지했다. 2위인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는 14번 무대에 올랐다. <그래픽 참조>


◆‘라 트라비아타’ 불패=왜 한국에선 ‘오페라 편식’이 이토록 심각할까. 한 민간 오페라단의 대표는 “한국에서 잘 공연되지 않는 작품을 올릴 경우 관객 숫자는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기업 후원을 받기도 힘들다”고 설명했다. ‘라 트라비아타’는 1948년 1월 서울 부민관에서 한국 최초의 오페라 공연으로 기록된 작품이다. 이후 국내 오페라의 대명사가 됐다. 세종문화회관에 따르면 지난해 공연된 베르디의 다른 작품과 비교했을 때 ‘라 트라비아타’는 회당 평균 200명의 청중이 더 들었다. 오페라 기획자들이 안전한 선택을 하는 이유다.

‘마술피리’가 유행하는 원인은 좀 더 독특하다. 국내에서 여름·겨울방학에 단골로 공연되는 ‘쉬운 오페라’로 자리잡았다. 공연장마다 ‘가족 오페라’ ‘어린이 오페라’라는 타이틀을 붙여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다.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고 선과 악의 구분이 나오는 내용 때문이다. 그 결과 최근 ‘라 트라비아타’를 따라 잡을 정도로 자주 무대에 올라가는 작품이 됐다.

방학에 ‘마술피리’가 있다면 겨울에는 푸치니의 ‘라 보엠’이 단골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 또한 공연장마다 달력식으로 올리면서 3위를 차지했다.

◆‘닭과 달걀’ 논쟁=오페라 칼럼니스트 유형종씨는 국내 오페라를 “공연 수준은 선진국, 레퍼토리 수준은 후진국”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물론 외국에서도 ‘라 트라비아타’는 인기 작품이지만 이렇게 편중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페라 역사에서 중요한 작품은 물론 현대 오페라의 걸작도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가 작곡가 야나체크, 쇼스타코비치, 훔퍼딩크 등의 실험적인 작품을 이번 시즌의 주요 레퍼토리로 내세운 것과 비교해볼 수 있다.

서울시오페라단의 박세원 단장은 “낯선 작품이라도 좋은 콘텐트로 만들어 올렸을 때는 오페라에 새로운 청중을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이 청중은 다시 신선한 작품을 공연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는 뜻이다. 박 단장은 “흥행이 안되기 때문에 공연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공연이 없기 때문에 청중이 늘지 않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성이 실종된 문화는 죽은 문화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한국 오페라 식단의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조사 대상 전국 10개 공연장=서울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고양아람누리, 의정부 예술의전당, 하남 문화예술회관, 대전 문화예술의전당, 대구 오페라 하우스, 울산 문화예술회관, 부산 문화회관, 광주 문화예술회관.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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