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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보자…일본식 경영 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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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두 은행이 합치면 종업원의 13%인 1만명을 줄이고 9000여억원의 비용절감 효과를 거둘 수…'.

거대 기업 간 인수.합병(M&A)과 대량 감원이 다반사인 미국 이야기 같지만, 실은 적대적 M&A를 추진 중인 한 일본 은행(SMFG)의 내부 보고서 문구다.

미국식 경영풍토를 받아들이는 데 한국보다 보수적이라는 일본의 비즈니스 관행이 근래 급변할 조짐이다. 대형은행 간 적대적 M&A가 공개적으로 시도될 분위기인가 하면, 대기업 경영자가 동종업계의 경쟁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전례가 드문 일이 속출하고 있다.

◆ 은행권의 적대적 M&A 소용돌이=일본 3위 은행인 미쓰이스미토모(三井住友)파이낸셜그룹(SMFG)이 4위 은행인 UFJ홀딩스에 적대적 합병을 추진할 지 모른다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31일 보도했다.

사정은 이렇다. SMFG가 뜸을 들여가며 자금난에 빠진 UFJ의 신탁 부문을 인수하기로 합의해 놓았더니 경쟁사(2위)인 미쓰비시도쿄(三菱東京)파이낸셜그룹(MTFG)이 끼어들어 지난 7월 중순 UFJ와의 합병을 덜컥 발표해 버렸다. 합병이 성사되면 미국 씨티그룹을 제치고 세계 최대 금융그룹이 된다.

SMFG는 UFJ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깼다고 법원에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UFJ에 '우리하고 1대 1로 합치자'고 제안했다. 이미 SMFG에 마음을 빼앗긴 UFJ가 이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UFJ가 SMFG의 제안을 끝내 거부하고 이달 초순 열릴 이사회에서 MTFG의 7000억엔 자금지원안을 승인할 경우 SMFG는 UFJ 지분 매수 등 실력행사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UFJ의 51% 지분 인수에 1조6000억엔(약 16조6000억원)이 들어 일본 사상 최대의 기업사냥이 될 전망이다.

우리금융지주 전략기획팀의 유용주 박사는 "정부가 앞장서 구조조정과 통합을 추진해 부실을 떨어내고 제법 몸집을 갖춘 일본 은행들이 지난해부터 소매금융과 해외영업 등을 강화하는 쪽으로 중장기 경영전략을 짜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UFJ에 대한 M&A 사례처럼 은행들이 더 이상 관치에 휘둘리지 않고 과감한 공격경영을 주도하는 일이 잦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 일본식 경영풍토 변화=이에 앞서 지난달 중순 일본 업계에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다. NTT도코모의 자회사인 도코모엔지니어링의 사장이던 쓰다 시로(58)가 경쟁사(3위)인 보다폰재팬의 사장으로 전격 선임된 것이다. 대기업의 고위 경영자가, 그것도 제3세대 이동통신(3G) 기술개발을 진두지휘해 NTT도코모를 자식처럼 키운 일등공신이 외국계 경쟁사 대표로 옮겨간 일은 일본 경영계 정서로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미로(迷路)처럼 복잡하게 얽혀 수입제품에 대한 효과적 진입장벽 노릇을 했던 일본의 유통망도 외국 자본에 문호를 열어젖힐 태세다.

일본 3위 소매업체인 다이에이의 채권은행단은 자금난에 빠진 이 회사에 더 이상 돈을 퍼주지 않고 미국 월마트 등에 제3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국익을 따지고, 공공기관 같았던 과거 일본식 은행이라면 자국의 유통업계를 세계 1위의 '유통 공룡'에 넘긴다는 발상을 쉽사리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4위권 수퍼마켓 체인인 세이유를 이미 인수한 월마트에 다이에이까지 넘어가면 월마트는 일본 내 2위 할인점 업체가 된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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