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6. 시 - 박형준 '빛의 소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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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
물 위에
가볍게 뜬
소금쟁이가
만드는
파문 같은

누가
하늘과 거의 뒤섞인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
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누가
고통의 미묘한
발자국 속에서
울다 가는가

<전문, '한국문학' 2003년 가을호 발표>

◇ 약력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91년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2002년 동서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빛의 소묘' 외 17편

시인 박형준씨는 "시적으로 안정됐다는 느낌이 들고, 최근 내 시의 경향을 잘 나타내주는 것 같다"며 자신의 미당문학상 후보작품 18편 중 '빛의 소묘'를 골랐다.

정작 '빛의 소묘'안에는 '빛'이 없다. 한차례 등장할 뿐이다. 박씨는 "삶은 끊임없는 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순간들이 빛"이라고 말했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했다. "기쁘거나 슬픈, 감정이나 느낌, 그것들이 리듬처럼 발산되는 순간들은 삶의 에너지가 되는데 그 순간들이 빛"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미세한 고통 같은 것들, 조그만 소금쟁이가 만드는 떨림이나 발자국 같은 것들, 삶의 숨겨졌던 빛깔이 드러나는 순간들이 빛"이라는 것이다.

궁금증은 문답이 오간 끝에 누그러졌다. "사물.사람들이 순간 순간 빚어내는 빛들이 있다"는 설명이 그중 알기 쉬웠다. 마음에 미세한 파문을 남기는 어떤 장면들, 여운처럼 지속되며 눈길을 붙들어매는 어떤 순간들은 마치 빛의 파장처럼 퍼져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씨는 "최근 2~3년간 지속적으로 빛에 관한 시를 30~40편가량 썼다"고 밝혔다. 빛에 관한 시는 그에게, 자꾸 자신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려는 관성과 사물 속에 숨은 빛깔을 찾고 싶은 욕망 사이에 타협점으로 만들어진 '관성과 욕망이 만나는 자리'라는 의미가 있다.

"시 독자들이 그런 깊은 내용을 읽을 수 있겠느냐.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내 시의 독자들은 의미론적으로 따지기보다는 뉘앙스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노을이나 기차 차창 밖 풍경을 보듯 나름대로 느끼고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문학평론가 김진수씨는 "박씨의 시는 기본적으로 유년의 기억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시에서는 현실과의 서걱거리는 마찰이나 불화 같은 것들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박씨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달.신발.바람 같은 시어들은 삶의 정처없음을 뜻하는데 그런 인식이 허무까지는 나가지 않고, 생의 덧없음을 고요하게 응시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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