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5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54. 백악관의 물밑 지원

한.일 국교정상화를 매듭짓기까지 나는 마치 미로(迷路)를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65년 2월 20일 마침내 한.일 기본관계 조약을 가조인하고 나니 또다른 고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다. 어업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월 3일 도쿄에서 시작된 한.일 농림장관 회의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혀 있었다.

그러던 중 朴대통령이 갑자기 나를 찾았다. '당장 일본에 가서 어업협상을 지원하라' 는 것이었다. 나는 당초 3월 11일부터 미국을 먼저 방문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공식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일정을 역순(逆順)으로 바꿨다. 朴대통령의 친서(親書)를 휴대한 채 비공식 방문 형식으로 10일 밤 하네다(羽田)공항에 도착했다.

이날 저녁 나는 시나(椎名悅三郞)외상 주최 만찬을 마친 뒤 차균희(車均禧)농림장관과 김동조(金東祚)주일 대사 등 우리측 대표단을 불러 '조속한 서명 원칙' 이라는 청와대 입장을 전달했다.

車장관은 '전관수역의 기선(基線)설정등 도대체 합의점을 찾을 수 없다' 며 한숨만 푹 쉬었다. 게다가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선포했던 '평화선' 에 대해서도 양측은 한치의 양보없이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수상관저로 사토(佐藤榮作)수상을 예방했다. 흡사 영화배우 같은 외모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朴대통령 친서를 전달하며 "어업협상도 빨리 끝냅시다" 고 했더니 사토는 "노력해야죠" 라고 화답했다.

사토와의 면담은 길지 않았다. 나는 시나 외상과 아카기(赤城宗悳)농상(農相)을 오찬에 초대했는데 아카기의 인상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노회(老獪)한 70대 정객 아카기와 미국 명문대 경제학 박사 출신에 40대 순수파 車장관은 협상 스타일 면에서도 서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이었다.

아카기에게 내가 "성(姓)이 '레드 크렘린' (아카키.赤城)이어서 우리가 뚫고 나가기 힘든 것 같다" 고 농담을 던졌더니 그는 껄껄 웃으며 "나는 붉은 장미꽃밭 처럼 부드러운데 車장관이 차를 몰고 들어와 헤집고 다니니 견딜 수 없다" 며 엄살을 떨었다.

노련한 말 솜씨였다. 결국 그날 열린 후속 어업협상에서는 김동조 주일대사가 제시한 '어업자원 공동조사수역' 안(案)으로 어업협상 타결의 실마리가 잡혔다.

우리는 이를 내세워 '평화선은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존재한다' 고 국민들에게 설명할 수 있었고 일본측은 '평화선은 사실상 사라졌다' 고 설명할 수 있었으니 묘책중의 묘책인 셈이었다.

나는 그날 오후 미국으로 건너가 존슨 대통령등 미국 지도자들을 연쇄 접촉했다. 특히 존슨은 걱정이 되는 듯 '한.일 회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 고 물어 "내가 귀로에 일본에 들러 마지막 협상을 할 작정인데 일본이 고자세여서 타결이 어려울 것 같다" 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존슨은 '뭐 도와줄 게 없느냐' 고 물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한.일 양국에 대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대등한 자세로 협상하는 것이니 미국이 맏 형으로서 한국에 힘을 좀 실어 주면 회담이 잘 될 것 같다" 고 부탁했다.

거구에 비해 유난히 눈치가 빠른 존슨은 공보관을 부르더니 귀엣말로 뭔가를 지시했다. 존슨은 내게 "일본과의 막바지 협상에 나설 한국 외무장관이 나와 형제처럼 친하다는 메시지가 일본에 전달되면 협상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며 내 손을 잡고선 옆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사진사가 들어오자 존슨은 내게 "李장관, 오랜만에 의좋은 형제가 만난 것 처럼 멋진 포즈를 취합시다" 며 껄껄 웃자 배석자들도 한 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백악관측은 바로 이 사진을 언론에 제공한 모양이었다. 다음날 아침 주요 신문에는 이 사진이 1면 머릿기사로 실렸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수단 하나를 더 얻은 셈이었다.

이동원 전외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