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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10주년 주역 헬무트 콜·고르바초프의 회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89년 11월 9일, 독일은 물론 전세계를 동서로 갈라 놓았던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후 폴란드.체코.헝가리 등 동유럽 전역에서는 공산 독재체제가 도미노처럼 붕괴됐고, 민주화와 시장경제 도입에 따른 급격한 변화가 뒤따랐다. 세계사에 남을 대사건을 이뤄낸 당시의 주역은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8일자 요미우리(讀賣)신문에 전재된 '글로벌 뷰포인트' 와의 회견에서, 콜은 아사히(朝日)신문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각각 10년 전 그날을 회상했다.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

베를린 장벽 붕괴 보고를 받은 것은 폴란드 공식 방문 때였다. 만찬 석상에서 동독이 장벽 통과를 허용했다는 취지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이때 베를린 장벽의 극적인 붕괴가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독일 통일은 고르바초프와 그의 개혁정책에서 비롯됐다. 그와 개혁정책이 없었더라면 장벽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장벽 붕괴 직후 과정에서 그는 나를 믿어주었다. 개혁에 적대적인 세력의 보고가 아닌 나의 얘기를 믿어준 데 대해 감사한다.

89년 6월 그가 서독을 방문했을 때 개인적인 신뢰를 쌓은 것은 다행이었다. 우리는 독일 문제에 대한 의견이 달랐지만 '평화' 를 겉치레가 아닌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였다.

그는 전차 출동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평화적 해결의 결단을 내려 동독 주민이 용기를 갖고 만들어낸 현실을 받아들였다.

동독 주민들은 당시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의 억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독의 현실을 바꾸자는 의식도 퍼져갔다.

이는 동독의 인권운동가들?오랫동안 바라온 것들이다. 인권운동가들이 공산주의 통치에 반기를 든 것은 독일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장벽 붕괴로 독일 문제는 다시 국제정치의 긴급 현안이 됐었다. 그러나 그 이후 불과 11개월만에 통일을 이룰 것으로는 생각지 못했다.

꿈은 실현됐지만 2개의 책임을 통감했다. 독일과 유럽의 통일을 동전의 양면으로 자리매김하는 것과 동독의 부흥이었다.

장벽 붕괴 10년을 맞아 2개의 목표가 완전치는 않지만 어느 정도 달성됐다는데 만족한다. 통일된 독일은 유럽과 끈끈히 연결되고 있다.

옛 동독 체제의 경제 구조개혁과 새 사회질서로의 이행은 세대를 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일단 성공을 거두고 있다.

독일인은 스스로를 하나의 국민으로 보고 있다. 질 높은 정치가 뒷받침되는 한 우리 앞에는 미래를 열어나가는 모든 가능성이 널려 있다.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은 '선택의 자유' 다. 냉전 사고가 와해되지 않았다면 장벽 붕괴는 없었을 것이다. 냉전 사고는 소련 국민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했던 80년대의 개혁과 함께 스러지기 시작했다. 이후 소련은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국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장벽 붕괴 다음날 주동독 소련 대사로부터 베를린시가 검문소 3개를 개방했다는 보고를 받고 "군대의 힘으로 군중을 저지하지 않아 좋았다" 고 했다.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은 민중의 희망이 냉전 종결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붕괴와 장벽 붕괴와는 심리적 영향을 제외하면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장벽 붕괴는 소련 내부에서 진행됐던 사태의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개혁.개방에 착수했을 때 공산주의 체제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환상이었다. 50~60년대와 달리 자유없는 체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장벽 붕괴 10년을 맞은 지금 시장경제 모델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고 있다. 기득권층은 더 늦기 전에 그 모델의 쇠퇴 조짐에 눈을 돌려야 한다.

냉전 종결 당시 우리는 세계가 (군사력이 아닌)이념 때문에 분단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련 붕괴 후 지정학적 야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미국은 유엔 무용론을 펼치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세계를 총괄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유엔은 개혁돼야 하지만 유엔 이외의 기구가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를 묵인하면 군사력에 의존하는 해결책만이 힘을 얻게 된다. 냉전을 종결시킨 사상은 국제질서를 정하는 요소가 군사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인류는 21세기를 맞아 2개의 벽을 부숴야 한다. 하나는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벽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세대와 미래 세대 사이의 벽이다.

자유의 결여가 공산주의 체제를 부식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정통성을 갉아먹게 될 것이다.

정리〓오영환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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