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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아파트까지 … ‘멧돼지 공포’ 안전지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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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21일 북한산국립공원 정릉지구 등산로 입구에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을 때의 행동요령이 적힌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김성룡 기자]

19일 밤 11시30분쯤 경북 구미시 옥계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때아닌 주민 대피 소동이 벌어졌다. 느닷없이 멧돼지 9마리가 동네에 나타난 탓이었다. 놀란 주민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자 멧돼지 중 8마리는 30여 분 만에 산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한 마리는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소란을 피우다 119구조대에 붙잡혔다.

15일 오전에는 전남 화순군 동면 운농리에서 주민 최모(76)씨가 제초작업을 하다가 멧돼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길이 2m에 몸무게가 250㎏이 넘어 보이는 거대한 어미 멧돼지였다. 최씨는 양쪽 종아리를 물려 10㎝가량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최근 멧돼지가 야산에서 민가로 내려와 피해를 입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농작물 피해가 커지고 있으며 특히 사람을 공격하는 사고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19일 오전에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주택가에 멧돼지가 나타나 지나가던 차를 들이받는 등 소란을 피우다 출동한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 과정에서 소방대원 한 명이 멧돼지에 물리기도 했다. 경북 상주시에서는 야외수영장에까지 멧돼지가 나타나기도 했다.

갑자기 도로에 뛰어들어 교통사고를 유발하기도 한다. 14일에는 울산시 언양읍 경부고속도로 언양 방면에서 길이 2m가량의 멧돼지가 승합차에 뛰어들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 승합차 운전자가 놀라서 급정거하는 바람에 뒤따라오던 차량이 추돌하는 사고로 이어졌다.

멧돼지의 출몰로 인한 농작물 피해도 상당하다.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야생동물 때문에 발생한 농작물 피해는 140억원에 달한다. 이 중 멧돼지로 인한 피해가 약 40% 정도로 추산된다.

충북 단양군의 농민 유모(68)씨는 “옥수수와 고구마·콩을 심은 밭이 여러 차례 멧돼지와 고라니의 습격을 받았다”며 “어린 순을 잘라먹거나 파헤쳐 가을걷이가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강성천(한나라당) 의원은 12일 환경부 국감에서 2007년 기준으로 전국의 멧돼지 서식밀도가 ㎢당 3.8마리로, 농작물 피해 예방을 위한 적정 밀도 1.1마리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환경부에 따르면 현재 전국적으로 멧돼지 수는 최대 17만 마리가량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멧돼지 수가 많아지면서 먹이 경쟁에서 밀린 멧돼지들이 민가에 출현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강원대 야생동물구조센터의 김종택 센터장은 “호랑이·늑대 등 멧돼지를 잡아먹는 포식자가 없어져 멧돼지의 숫자가 늘어난 데다 먹이 경쟁에서 밀리거나 분가한 멧돼지들이 민가 인근까지 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숫자가 증가한 데는 멧돼지의 왕성한 번식력도 한몫하고 있다. 멧돼지는 5~6월에 10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는데 천적이 사라져 새끼 때 사망하는 경우가 줄고 있다고 한다.

동물 이동 통로의 파괴 등 환경 문제도 멧돼지의 도심 출현 요인으로 꼽힌다. 광주시 우치동물원의 최종욱 수의사는 “무분별한 개발로 사람과 동물이 사는 영역이 겹치는 곳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국립환경과학원 김원명 박사는 “2000년대 전까지 심했던 밀렵이 단속으로 크게 줄면서 멧돼지 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멧돼지와 고라니 등을 유해조수로 분류하고 경찰·수렵인협회의 협조를 받아 포획에 나서고 있다. 또 이들 야생동물의 출현이 잦은 지역에 전기울타리를 치기도 한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최근 야생동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해 빛과 소리를 결합시킨 야생동물 퇴치 장치를 개발, 농가에 보급하기로 했다.

강갑생 기자·[전국 종합] ,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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