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과학칼럼

혼돈과 질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5면

일본에서 반년 남짓 산 적이 있다. 한국에 비해 일본은 모든 게 질서정연해 보였다. 질서에는 편리함의 아늑함이 숨어 있다. 일요일 점심에 종종 들르던 메밀국수 집은 깨끗해 좋았다. 특별히 제작한 발판에 올라서서 냉장고 위까지 물걸레로 닦는 그 집 종업원을 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우리 집 냉장고 위에 쌓여 있을 먼지 층의 두께가 궁금하다고. 여기까진 그래도 봐줄 만했다. 교토 긴카쿠지(銀閣寺)에서다. 50대 후반의 한 남정네가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팔레트 칼과 넙적한 붓으로 잔디밭과 보도의 경계를 정교하게 다듬고 있었다. 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공의 모독이었다.

분리수거 날이면 묵은 신문지 보따리를 집 앞에 내놓는다. 처음에는 그게 신문지 뭉치인 줄 몰랐다. 칼로 자른 듯한 직육면체 덩이를 광고전단지로 말끔하게 싸고 다시 끈으로 단단히 묶었기 때문이다. 신문 뭉치가 아니라 주부의 고생덩이였던 것이다. 아침이면 골목 모퉁이에 예닐곱 명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모인다. 작은 깃발을 손에 든 30대 주부가 매일 같은 시각에 나타나 이 어린이들을 학교로 인솔한다. 안전도 중요하지만 한 줄로 따라가야 하는 저 아이들은 얼마나 지겨울까. 일본 어린이의 불행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통계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골프 게임의 승패는 운이 3할, 실력이 7할을 지배한다고 한다. 실력이 운보다 두 배 이상 중요하므로 골퍼는 사시사철 연습에 열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운의 활동 공간이 전혀 없다면 누가 타이거 우즈와 골프를 치려고 하겠는가. 골프의 묘미는 3할의 운에 달려 있다. 실력이 승패의 9할 이상을 지배하게 된다면 골프 인구는 갑자기 줄 것이고 우즈라도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것이다. 내가 경험한 일본의 구석구석은 운보다 실력이, 우연보다 필연이, 혼돈보다 질서가 철저하게 지배한다. 일본은 한마디로 재미없는 사회였다. 귀국 날이 가까워지자 그동안 필연의 틀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던 내 영혼이 일본의 질서보다 한국의 혼돈을 더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구 생명의 속성은 ‘자기 복제’와 ‘다윈 진화’로 요약된다. 현대 과학은, 자기복제 분자의 우연한 출현에서 지구 생명의 기원을 찾는다. 우리가 ‘따뜻한 원시 수프’라 부르는 유기물의 농축액에서 벌어진 분자들 사이의 무작위 충돌이 자기 복제 기능을 갖춘 유기분자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억 년 전에 있었던 우연한 사건이 무생물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준 셈이다. 한편 다윈 진화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 그 핵심이다. 돌연변이가 우연의 소산이라면 자연선택은 필연의 귀결이므로 인간은 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자연의 최대 걸작품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삶에서 우연의 역할은 태고의 유산인 셈이다.

한국은 운과 우연의 역할이 일본에서보다 조금 더 중요한 사회다. 한국의 역동성은 찰나의 순발력으로 판세를 가르는 바로 이 우연의 속성에서 유래한다. 혼돈은 새로운 질서로의 관문이다. 한국동란이 반상(班常)의 적폐를 말끔히 몰아내지 않았는가.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혼돈의 파도를 타고 질서의 일상을 넘어 미지의 ‘블루오션’에 도전하라.

홍승수 서울대 명예교수·물리천문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