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외고 문제, 수월성이 본질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5면

정치권에서 촉발된 외국어고(외고) 존폐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외고를 자율형 사립고 또는 자율고로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곧 발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외고를 아예 일반고로 전환하자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여야 모두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외고는 존폐 기로에 놓여 있는 절체절명의 국면을 맞고 있다. 위기감을 느낀 일부 외고에서는 영어듣기시험 폐지, 입학사정관제 도입 등의 개선책을 내놓고는 있지만, 정치권의 외고 폐지론에는 강력 반발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9월 ‘외고 때리기’에 나선 정부에 맞서 전국 외고 교장단이 집단 반발했던 혼란이 되풀이되는 모양새다. 한국교총도 정치권에서 사교육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제기하고 있는 외고 폐지 방안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밝혀 논란이 증폭될 전망이다.

외고가 ‘공공의 적’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외고가 사교육의 주범이라는 인식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외고 입시가 사교육을 유발시키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고를 없애면 학부모들의 사교육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막연한 기대일 뿐이다. 외고가 없어진다고 해서 사교육 문제가 해결될 정도로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수요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교육 시장은 번성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외고가 없어지면, 사교육도 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상을 쫓아 사교육은 재빠르게 움직이게 돼 있다. 좋은 학교, 좋은 대학을 향한 학부모들의 강렬한 열망이 존재하는 한 이른바 풍선 효과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학교 몇 개 없애는 식의 극단적·단기적 처방은 교육계에 혼란과 불안감만 가중시킬 뿐이다. 비록 멀고 험한 길이기는 하지만 공교육 살리기와 새로운 패러다임의 대입제도 구축을 통해 사교육 열기를 점진적으로 진정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 사교육 해법에 단방약은 없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공교육의 기초체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것만이 가장 빠른 길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외고 문제는 사교육 대책 차원이 아니라 교육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숨 막히는 평준화 체제 하에서 수월성 교육의 숨통을 터주었던 학교가 외고를 포함한 특목고가 아니었던가. 외고가 글로벌 시대를 선도하는 우수한 인재를 양성해 온 것 역시 숨길 수 없는 사실 아닌가.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국가발전을 견인해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글로벌 리더를 길러내야 하지 않는가. 이들 학교가 지난 25년 동안 이뤄 온 공과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분석 없이 폐지를 성급하게 서두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외고의 교육 목적, 교육과정 운영, 학생 선발, 대입과의 관계 등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은 폭 넓은 공론화 과정을 거쳐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외고 입시는 사교육 유발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편돼야 할 것이며,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입학 기회를 일정 비율 할당하는 균형선발제를 과감하게 도입해야 할 것이다.

근원을 따지면, 외고 문제는 평준화 체제 속에서 수월성 교육 기회가 극히 제한돼 있는 구조와 관련이 있다. 30여 개의 외고만으로는 학부모들의 수월성 교육에 대한 높은 수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다.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수월성 교육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극심한 불균형 상태에 놓여 있는 셈이다. 따라서 고교 교육 체제의 다양화 틀 안에서 수월성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수월성 고교 모형을 창안해 냄으로써 이번 논란이 한국 교육발전을 위해 결코 헛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노종희 한양대 교수·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