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 동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7면

동녘의 창에서 사람은 여명(黎明)의 아스라함을 느낀다. 서늘한 북쪽의 창가에서는 세사(世事)로 번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 햇볕 따사로운 남향의 창에서는 삶의 편안함을 맛볼 수 있다. 해 질 무렵의 서쪽 창가에서는 찬연한 노을을 바라보며 ‘사라지는 것’의 장엄미를 반추한다.

창(窓)은 이래서 중요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는 사람이 복잡다기한 세상만사를 뒤로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장치다. 창이 있어서 생각은 다듬어질 수 있고, 시간에 쫓기는 삶은 잠시 숨을 고른다.

동양에서의 창은 예부터 학문 수련의 장소라는 의미를 지녔다. 옛 서당에서 학동들이 연습 삼아 쓴 글들은 ‘창고(窓稿)’ 또는 ‘창과(窓課)’로 불렸다. 같은 스승 아래에서 함께 글을 읽은 사람들은 ‘창우(窓友)’다. 또 이들의 우정을 ‘창의(窓誼)’라고 했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십 년의 힘겨운 공부에 매달릴 동안에는 찾아주는 이 없다가, 과거에 급제하니 세상이 모두 알아준다(十年寒窓無人問, 一擧成名天下知)”는 말이다. 없는 살림에 어렵게 공부를 이어간 세월을 ‘차가운 창’이라는 뜻의 ‘한창(寒窓)’으로 적었다.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를 창문으로 부른 이유가 궁금하다. 이를 설명하는 자료는 마땅한 게 없다. 미루어 보건대 세상의 번잡함 속에서도 사람이 여유와 함께 청정한 생각을 유지할 수 있는 창문의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동양 사회의 공부라는 것이 단순한 지식의 축적보다 사람 됨됨이를 중시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같은 장소에서 배움을 함께한 사람은 그래서 동창(同窓)이라고 불린다. 중국 송(宋)대에 처음 그 용례가 보이다가 요즘의 현대 한자 용어를 집중적으로 번역한 일본에 의해 쓰임새가 많아졌다.

대원외고 등 일부 특수목적고 졸업생이 법조인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해서 화제다. 자연스레 이들이 신흥 파워집단으로 올라서는 점에 대한 우려도 따른다. 과거 일부 명문고 출신들이 보인 맹목적 학연(學緣) 중심의 결속 행태에 따른 걱정이다.

함께 공부한 그곳 창문의 의미를 되새겨 과거의 선배들이 보인 추태를 거부해야 이 시대의 진정한 엘리트다. 신흥 명문 출신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혈연·지연에 학연까지 다시 난무한다면 이 사회의 희망은 없다.

유광종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