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아들 골프 신동 만든 탁구 스타 안재형의 부친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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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 ‘또르르~.’
홀에 골프공이 쏙 들어가자 안재형(44) 감독은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외쳤다. 지난 8월 31일, 아들 안병훈(18)군이 골프 유학을 떠난 지 4년 만에 미국에서 열린 ‘US 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십대회’(이하 ‘아마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2.7g 작은 탁구공으로 세상을 호령했다면 병훈군은 45g의 골프공으로 최고가 되려 한다.


“지도자 생활하면서 우승을 많이 맛봤지만 지금 이 기분과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쁘네요. 하하하.”

아들이 경기장에서 2시간 넘게 인터뷰를 하고 사진 촬영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꿈이 현실이 된 이 순간을 마냥 즐거워했다. 아들의 재능과 가능성을 세계에 확인시켜준 데다, 2년 동안 부지런히 뒷바라지했던 보람이 느껴져서였을 게다.

“실은 64강이 목표였는데 뜻밖에 성적이 너무 잘 나와서 어리둥절해요. 아마추어 때 이뤄야 할 최고의 목표를 너무 일찍 달성한 것 같기도 하고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로부터 긍정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축하 파티는 어떻게 했나?”라고 물으니 “클럽하우스에서 밥 먹었다”라 답하며 멋쩍게 웃는다. 스스로 ‘멋없는 아빠’라고 시인하면서도 ‘그래도 성실한 아빠’라고 강조한다.

탁구 선수 아빠가 ‘골프 대디’ 자처한 이유…
1년 전, 아내 자오즈민(46)과 부부 동반으로 ‘베이징올림픽’ 탁구 해설을 맡아 오랜만에 모습을 비춘 안재형 감독. 그전까지만 해도 ‘탁구계를 떠난 지도자’라는 것 외에 근황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후 미국에서 골프 유학 중인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지도자의 길을 잠시 접기로 했다는 얘기가 늘려왔다. 당시 기자가 인터뷰를 제안했지만 “운전기사 해주는 것 외에 하는 게 없다. 좋은 소식 있을 때….” 라며 고사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1년 뒤, 병훈군은 아시아인 최초로 ‘아마대회’에서 우승컵을 안았다. 이제야 그는 지난 2년간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먼저 아들이 어렸을 때는 운동에 썩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부터.

“어렸을 때 병훈이는 뚱뚱한 편이었어요. 달리기, 축구 모두 형편없었죠. 제가 골프를 배우러 다니면서 아들을 종종 데려갔는데 제가 연습하는 걸 보고 자기도 치겠다며 따라 하기도 했어요. 어느 날 골프클럽을 손에 쥐어줬는데 곧잘 공을 치더라고요.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듬해부터 특별 활동 시간에 골프를 가르쳤어요.”

골프와 공부를 병행하던 아들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좌절을 맛봤다.
“다른 아이들은 대회를 앞두고 학교도 가지 않고 연습과 전지훈련을 하는데 병훈이는 수업도 듣고 골프도 하려니 상대가 되지 않았어요.”


아들은 성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서울CC에서 훈련하면서 실력을 키웠다. 하지만 한국에서 골프 선수가 되려면 연습을 위해서 1년 골프 회원권을 끊어야 하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고, 골프장 위치도 서울과는 거리가 있어서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아들이 중학교 2학년을 마치던 2005년 12월, 본격적인 골프 유학을 위해 미국 플로리다 주 브래든턴으로 건너갔다. 그는 1년 정도가 지나면서 아들의 홀로서기가 가능하다고 판단해 2006년 말 대한항공 감독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갑자기 혼자가 된 아들은 홈스테이를 전전하며 지냈고, 훈련 스트레스와 영양가 있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해 빈혈로 쓰러졌다. 1년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돌보던 2007년 3월, 아들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사표를 냈다.

“운동선수한테 제일 중요한 게 테크닉보다 체력이잖아요. 그것도 한창 성장하는 시기인데 빈혈이라고 하니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라고요. 골프라는 운동이 하루 종일 햇볕 아래 서 있어야 하는데 체력이 바닥나 쓰러진 아들을 혼자 내버려둘 수 없었어요. 병훈이한테 아빠가 필요한 시기는 지금이다 싶어서 미련 없이 감독직을 그만둘 수 있었어요.”

이후 그는 68세 노모와 함께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갔다. 할머니는 손자가 좋아하는 김치찌개와 매운 음식 등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주고, 그는 운전사, 캐디, 매니저 등의 역할을 해내며 ‘골프 대디’로 변신했다. 그 덕분에 병훈군은 키 186cm, 몸무게 96kg의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게 됐고,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몸으로 힘든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아들 위한 건데 뭔들 못하겠어요. 그런데 영어가 짧으니까 그것만큼 답답한 게 없더라고요. 하루는 어떤 미국인이 집에 와 뭐라고 하기에 무조건 ‘No’라 그랬죠. 그랬더니 다음 날 전기가 끊어지더군요(웃음).”

아들을 뒷바라지해 오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부자가 한겨울에 중국 남부 지방으로 골프 전지훈련을 갔을 때다. 두 달 넘게 그가 직접 빨래와 밥을 했는데 ‘가사일이 힘들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하지만 ‘골프 대디’ 2년 차인 지금은 가사일이 몸에 배었다. 중국 베이징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 떨어져 지내는 엄마의 역할까지 해내며 필드에서는 캐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10년 넘는 구력을 지닌 그의 골프 실력은 보기 플레이 수준.

“제가 클럽이나 퍼팅을 잘 알아서 캐디를 하는 건 아니에요. 사실 아마대회에서 전문 캐디를 기용하는 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보통 아마대회에는 가족 중에 한 명이 캐디로 나서는 경우가 많아서 저도 병훈이의 캐디로 나선 거죠. 하지만 작전을 지시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경기가 잘 풀린다고 이러쿵저러쿵 얘기하지 않고, 실수하면 어깨를 토닥여주지요. 아무래도 큰 경기일 경우에는 아빠가 옆에 있어주니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나 봐요.”

요즘 대화 주제는 아들의 정서 변화…
“요즘 아들이 사춘기예요. 운동이냐 학업이냐 미래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할 때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짜증내고, 그러다가 또 아빠한테 미안한지 옆에 와서 애교 부리고…. 아내가 있다면 세심히 보살펴줄 텐데 제가 워낙 서툴러서 그런 부분을 잘 못해요.”

그는 병훈이의 정서적 변화가 감지될 때는 중국에 있는 아내에게 코치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하루에도 3~4번씩 통화를 한다. 주된 대화의 주제는 아들의 교육 문제이다.

“저도 탁구 선수를 했지만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이 ‘운동선수는 무식하다’라는 말이에요.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병훈이에게 학교 수업은 꼭 다 듣게 했어요. 우수한 성적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운동 때문에 기초 지식이 제로가 되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무조건 아들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스스로 본보기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아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돌아간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아들을 학교까지 데려다준 뒤 아들이 학교 수업을 받는 동안 그는 집에서 영어와 스포츠 외교학 등을 공부한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차에 태우고 골프 연습장으로 향한다. 아들이 레슨을 받는 동안 그도 골프 연습을 한다.

“기러기 가족으로 지내면서 힘든 점은 추억이 적어진다는 거예요. 그 때에만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아이한테 그런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가 많이 속상해해요”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규칙적이고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시작했어요. 다행히 병훈이한테 이런 아빠의 모습이 자극이 되나 봐요. 그래서 일부러 집에서 잘 안 읽는 문학책을 읽고 있기도 해요(웃음).”

프로 골퍼로 전향하기보다는 당분간은 공부와 골프를 병행하면서 기초를 다져놓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바람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탁구 선수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애초부터 탁구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선수 생명이 짧잖아요. 20대 넘어가면 못하니까. 골프는 50대까지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병훈이가 가르친 적도 없는데 탁구를 잘 쳐요. 빠른 몸 움직임을 위한 훈련을 위해 가끔 탁구를 치게 하는데 탁구 선수랑 똑같은 폼을 내요. ‘탁구를 이렇게 잘하는데 골프를 괜히 시켰나’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하하”

병훈군은 내년 9월, 4년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버클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진학할 예정이다. 골프 환경이나 대우 조건이 좋아서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아들은 아빠의 바람대로 골프와 대학 생활을 병행할 예정이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아내, ‘글로벌 가족’의 소통법…
그는 “결혼할 때부터 글로벌 가족이었다”고 했다. 아내 자오즈민은 친정이 있는 베이징에 종종 들르다가 휴대폰 서비스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예 중국에 건너가 있다.

“병훈이가 미국에 오기 전에도 아내는 중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래도 베이징은 비행기 타고 3시간이면 가는 거리기 때문에 왕래도 잦았고, 서로 잘 챙겨줬죠.”
자오즈민은 아들이 미국으로 떠난 뒤 그리움은 더욱 짙어졌다. 아들과 함께 해주지 못하는 엄마의 미안한 마음을 그녀는 편지로 대신하곤 한다.

“제가 워낙 무뚝뚝한 편이라 살가운 얘기를 잘 못해요. 대신에 병훈 엄마가 아들한테 이메일을 자주 써 보내요. 워낙 글 쓰는 걸 좋아하는데 이건 연애편지인지, 뭔지…. 아무튼 매일 통화하는데도 편지 내용은 너무 애틋하다니까요(웃음).”
그는 아들을 챙기는 아내의 모습이 사랑스러운 듯했다. 그는 아내를 “낭만 아줌마’라고 표현했다. 남편에게도 쪽지와 편지를 통해 애정 표현을 하는데 그렇게 모아둔 편지들이 생활의 활력소이다.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아직까지 회자될 만큼 유명하다.‘서울올림픽’(1988) 때 남자복식 동메달을 땄던 그가 당시 같은 대회에 중국 여자 대표로 나와 복식 은메달과 단식 동메달을 딴 자오즈민과 이듬해 국적을 초월해 결혼식을 올린 것. 자오즈민보다 연하였지만 그는 아내가 ‘63년생’이라고 말하자 자신은 ‘62년생’이라고 답했다.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에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세 살이나 높여 말해버린 것. 아내는 결혼한 후에야 그가 연하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옛날 얘기하니까 좀 쑥스럽네요. 언어도 통하지 않는데 몸짓 발짓 해가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그 시간이 너무 설레었니까요.”

지금 그녀는 한국 옴니텔이 출자해 설립한 ‘옴니텔 차이나’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2003년 사업 초기에는 작은 사무실 한 칸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중국 31개 성에 지사를 낸 중견 기업으로서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베이징 본사에만 150명의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다.

“아내는 사업이 너무 잘되다 보니 많이 바빠요. 운동할 때도 집념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업가로서도 그런 집념을 발휘하더라고요. 나이가 들수록 매력이 깊어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아내는 한결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기러기 가족으로 지내면서 힘든 점은 추억이 적어진다는 거예요. 그때에만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아이한테 그런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가 많이 속상해해요. 그래도 아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자주 오려고 해요.”

지난 6월에는 플로리다에 가서 아들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만들어 파티를 했다. 지난 9월 초에는 대한골프협회 주최로 열린 ‘한국오픈대회’에 병훈군이 참석해 세 가족이 필드에서 모이기도 했다. 경기 중인 아들을 쉴 새 없이 디지털 카메라로 찍으면 ‘우리 아들 최고!’라고 자랑하는 그녀의 모습은 여느 엄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좋은 아빠, 좋은 남편으로 살고 싶다는 그에게 꿈이 하나 보태졌다. 아들이 대학 입학 후 자립하면 한국으로 돌아와 탁구인으로서 봉사하겠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틈틈이 스포츠 외교와 경영 이론을 공부하고, TV로 탁구 시합을 보며 모니터링을 잊지 않는다. ‘골프 대디’에서 ‘탁구인 안재형’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는 것. 기회는 꿈꾸는 자에게,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

취재_민은실 기자 사진_김연지(studio l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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