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갈등 "칼에서 대화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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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오랫동안 갈등과 반목을 거듭해 온 지구촌 종교계가 종교간.종파간 화해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이들의 화해 움직임은 20세기를 마감하고 새 천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가톨릭과 개신교가 지난 4백78년에 걸친 교리상의 갈등을 청산, 오랜 반목을 종식하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연 것도 그 하나. 이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당시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관행과 관련,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내걸었던 '95개조 격문' 이라는 제목의 격문에서 제기했던 구원 방법론에 대한 교리논쟁이 종결됐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양측간에 이뤄져 온 갈등과 반목의 관계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난달 25~28일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선 '새 3천년대의 전야에 : 종교간 협력' 이라는 주제로 세계 종교지도자 회의가 열렸다.

가톨릭.개신교.불교.이슬람교.힌두교 등 주요 종파 성직자 2백여명이 모여 21세기를 앞두고 세계화.빈부격차 문제에 각 종교가 마음을 열고 앞장서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티베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악수 장면은 세계인들에게 종교간 화해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지난 70년 창립돼 종교간의 화해운동을 펼치고 있는 세계종교인 평화회의도 이달 25~29일 요르단의 암만에서 '공공의 삶을 위한 활동 : 다음 천년의 종교의 역할' 제7차 총회가 열려 다음 천년의 종교간 화해를 논의한다. 총회에는 20여 종교 지도자 5백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3월 동방정교와 가톨릭의 분리 1천주년을 맞아 동방정교 신자가 대부분인 루마니아를 방문, 루마니아 정교 주교와 합동미사를 집전했다. 당시 교황은 가톨릭 신자가 2백만명이 넘는 루마니아 서부 트랜실바니아주에는 들르지 않았다.

또 현지 가톨릭 관계자와도 만나지 않아 루마니아 방문이 정교회와의 화해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지난 5월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전세계 불자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교황이 불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는 사상 처음이다.

지난 3월에는 또 이슬람교 시아파 지도자이자 고위 성직자인 이란의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 바티칸을 방문했다. 그는 교황과 만나 '문명간의 대화' 를 제안했으며 "다음 세기를 칼이 아닌 대화의 세기로 만들자" 고 촉구했다.

이에 교황은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의 화해를 다짐했다. 가톨릭의 수장과 이슬람국가의 지도자가 화해를 다짐한 것은 11세기 유럽의 십자군이 이슬람국가인 셀주크 투르크를 공격해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교황은 9월 1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행한 연설에서 지난 천년 동안 벌어졌던 이슬람교도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유혈행위,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리와 반목, 반유대주의 등 로마 가톨릭이 저질렀던 역사적 과오에 대해 공개 사과했다.

그는 "역사적 과오에는 기독교인들의 분열, 관용하지 못하는 태도, 폭력, 인간 기본권 말살에 대한 무관심 등이 모두 포함된다" 고 밝혔다.

◇ 남은 종교 갈등〓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종교간에 험악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올해 들어 정치불안이 가속화한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교도 거주지역으로 이주했던 기독교도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곧 분리 독립할 동티모르에서는 9월초 반독립파 민병대가 가톨릭 교회를 습격, 방화하면서 3명의 사제.12명의 수녀와 함께 1백여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이스라엘의 오랜 점령지였던 요르단강 서안지구에는 현재도 이슬람교를 믿는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 정착민, 기독교도간에 갈등과 유혈극이 계속되고 있다.

한 도시에 가톨릭교회.정교교회와 이슬람교의 모스크(사원)가 함께 위치한 사라예보 역시 91~95년 사이의 내전을 거쳐 국제평화유지군의 주둔 아래 현재 간신히 갈등을 누르고 있다.

하지만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고위 종교 지도자간의 화해 움직임은 다음 세기가 갈등이 아닌 화해의 시기로 가고 있다는 하나의 징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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