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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감시견 길들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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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국가가 날을 세우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기강을 바로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날 선 권력의 다른 한쪽에 ‘김제동 전격 교체’ ‘손석희 하차’ 같은 장면이 어른거린다. 정권의 행보에 자신감이 실릴수록 괘씸죄에 걸려 보따리를 싸는 스타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KBS, MBC 길들이기는 정권교체에 따른 통과의례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희망제작소 박원순 변호사가 눈물을 흘린 것은 정권의 풍향에 민감한 기업들이 발 빠르게 조치한 때문이고, 시민단체의 사령부인 참여연대가 위축된 것도 화려했던 시절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지난 정권의 ‘이념청소’가 슬슬 재현되고 있는 듯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 많던 감시견들도 보무당당한 권력 앞에서 꼬리를 내린 것인지.

주요 언론들마저 민감한 사안에는 몸을 사리는 게 요즘의 분위기다. 지난 정권에서는 사사건건 덤벼들었던 그 치열한 검열정신을 무엇에 쓰려고 저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사이, 국가권력이 성큼성큼 다가와 자신들을 굽어본다는 환상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찰기관들이 이단아(異端兒)들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그 물증 없는 의구심이 세간에 안개처럼 슬슬 퍼지고 있는 것이다. 아, 감시견(監視犬)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국가권력이 비대해질 때야말로 감시견의 역할이 아쉬운 시점이다. 지난 시절, 시도 때도 없이 짖어 밉기도 했던 시민단체들, 때로 권력자와 진군가(進軍歌)를 합창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던 열혈단체들이 초겨울 외투처럼 그리워지는 이유다.

‘권익’은 권력에 내장된 폭력성을 순치하고 여과하는 데에서 나온다. 반부패·청렴도 중요한 방편이겠으나, 국민 편에 서서 국가를 바라봐야 권익의 진정한 뜻이 잡힌다. 이런 기관이 있기는 하다. 2001년 설립된 인권위원회는 이성적으로 짖어댔던 쓸 만한 감시견 중 하나였다. 국가권력과 개인 사이의 그 미묘한 경계에 서서 개인적 권한을 보호하는 시민의 원군(援軍), 어둡고 외진 곳에 웅크린 집단들, 내던져진 가치들을 사회적 양지(陽地)로 편입하는 ‘형평(衡平)과 경장(更張)’의 메신저가 인권위다. 그런데, 권익위가 이재오의 카리스마에 힘입어 공중부양을 하는 사이, 인권위는 몰락한 잔반 신세가 되었다. 인권문제가 개혁의제에서 제외되었던 인수위 시절에 예상 못한 바 아니지만, 인권 근처에 가본 적이 없고 평생 권력기관과 각을 세운 적이 없는 인물이 수장에 임명되자 공들여 짠 인권의 사회적 신경망이 마비될 운명에 처했다.

인권위의 본업은 자주 짖는 것이다. 정부와 민간의 실력자들이 으름장을 놔도 권리침해 혐의가 있으면 짖어야 한다. 의기(義氣)에 충만해서 경고장을 날리고 시정조치를 촉구해야 한다. 그런데, 신임위원장은 의기에 바람을 빼고, 행안부발(發) 조직축소 지시를 다소곳이 받들고, 정부와의 불편한 의제를 유보하고, 조금 나대는 전문가들을 내쳤다. 더 나아가 70개 인권선진국 회의체인 국제조정위원회 의장국 선임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이 눈뜬 그 국격(國格)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이다. G20 정상회의를 유치한 청와대가 귀국 비행기에서 만세삼창을 외치는 동안에 말이다. 이제 곧 인권은 중앙공직자의 뇌리에서 사라져 동네 주민센터의 작은 민원에 지나지 않게 될 터이다.

정권이 인권문제의 뇌관을 제거하려고 이런 인사를 단행했다는 악의적 해석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의 인권모델’이 후발국의 모범으로 더 이상 칭송되지 않고, 국제조정위가 한국의 인권등급을 하향 조정한다 해도 안타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감시견 길들이기’가 지난 정권 못지않게 도처에서 야심만만히 추진되고 있다면 절망할 것이다. 사람들을 내치는 좌파정치에 등을 돌렸던 민심은 ‘끌어안는 보수정권’을 기대한다. 인권은 포용정치의 길잡이이자 좌우를 묶는 통합정치의 이정표다. 인권위 정도의 쓸 만한 감시견을 못 견딘다면, 시민들의 마음에 권력공포증 같은 그 물증 없는 의구심이 터를 잡고 급기야 정권 거부감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그다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