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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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43. 美정부의 두 얼굴

66년 1월초 험프리 부통령은 청와대로 朴대통령을 예방, 전투부대 증파(增派)에 관한 존슨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대통령과의 면담 때 봤더니 험프리는 입담이 얼마나 좋던지 마치 신명 난 무당처럼 보였다. 朴대통령도 그의 입심에 잠시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래서였을까. 朴대통령은 일단 파병을 원칙적으로 긍정 검토한다는 언질을 주었다.

나는 다시 브라운 주한 미대사를 매일 만나다시피 하며 후속협상에 들어갔지만 별반 진전은 없었다. 미국이 한국지원을 약속해 놓고는 정작 전투병력이 파병되자 '나 몰라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가운데 66년 2월 7일 하와이에서 미-베트남 정상회담이 열렸다는 뉴스가 들어왔다. 한국군 전투병력이 파견된 마당에 우리측이 아무런 사전 통보도 받지 못했으니 정부 분위기가 격앙될 수 밖에 없었다.

朴대통령은 내 보고를 받자 "괘씸한 놈들, 우리를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하며 펄펄 뛰었다. 나는 "차라리 잘 됐습니다. 이번에 본때를 보여주는게 좋겠습니다" 며 비책(秘策)을 내놓았다. 다음날 朴대통령은 브라운 대사를 청와대로 불러 '전투병력 증파 문제는 없던 일로 해야겠다' 며 역습을 했다.

그러자 브라운은 사색(死色)이 된 얼굴로 나를 찾아 와 "한국측이 미-베트남 정상회담에 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 이번 회담은 어디까지나 양국 관심사를 논의하는 것이지 전쟁 얘기가 아니다" 며 변명을 늘어 놓았다.

나는 '잘 됐다' 싶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전쟁이 한창인데 미국과 월남이 전쟁 얘기를 빼면 할 얘기가 뭐 있소. 4차 파병은 없던 걸로 합시다. " 우리측은 파병 문제와 관련된 모든 논의를 중단한 뒤 2월초로 예정된 朴대통령의 태국.말레이시아.대만 순방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창설작업을 해 온 아시아.태평양 각료이사회(ASPAC) 최종 정지작업을 위한 순방이었다.

그런데 朴대통령이 나를 부르더니 "임자, 이번 순방에 집 사람은 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영부인이 몸 져 누워 있지 않는한 갑자기 스케줄을 바꾸면 외교적으로 큰 결례' 라고 설명했는데도 朴대통령은 막무가내였다.

육영수(陸英修)여사에게 물어 봐도 자신은 이번 순방에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얘기를 자세히 들어 봤더니 그무렵 朴대통령과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는데 대통령이 아직도 화가 덜 풀려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陸여사에게 외교관례를 자세히 설명한 뒤 '일단 비행기를 타면 외무장관이 지휘관이고 대통령도 어쩔 수 없으니 꼭 가셔야 한다' 고 설득했다.

출발 당일은 다소 긴장도 했지만 내가 워낙 대통령에게 '국제관례…' 운운 하며 압력을 넣었던 터라 朴대통령은 더이상 관여하지는 않았다. 두 분은 그러나 순방 공식일정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목한 모습이었다.

태국 방문이 시작되자마자 윤호근(尹浩根)외무부 의전국장이 '미국에서 급전(急電)이 왔다' 며 내게 가져 왔다. 내용인즉, '방콕방문 기간중 험프리 부통령으로 하여금 朴대통령과 면담을 갖도록 하겠다' 는 것이었다.

나는 尹국장에게 '대통령이 지금 태국을 공식 방문중이다. 만약 이 기간중 험프리를 만나게 되면 태국정부에 대한 결례가 된다' 며 태국주재 미국대사를 만나 거절하라고 지시했다.

자초지종을 보고 했더니 朴대통령도 "미국 부통령이 정월 초하루부터 한국엘 오지 않나 이번에는 태국까지 와서 만나겠다니 그 놈들 급하긴 급한 모양이구만" 하며 별로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자 미국은 또 한 통의 전문을 보내왔다. 험프리 부통령을 다시 서울로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이번 방한에는 존슨대통령의 해결사로 유명한 해리먼 전 소련주재 미국대사도 동행한다는 것이었다.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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