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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54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19)

증서에는 작성한 날짜와 손달근(孫達根)이란 이름이 적바림되었고, 지장(指章)까지 찍혀 있었다. 처음 찍은 것은 인주 자국이 희미했지만, 다시 가다듬고 덧찍어둔 지장은 손씨의 지문(指紋)이 세필로 그린 듯 선명했다.

갈겨쓰다 말고 또박또박 박아 쓴 두 가지 필적이나 지장을 두 번이나 찍은 흔적으로 보아 마지못해 작성된 차용증서인 것이 분명했다.

빌려 쓴 금액은 1천8백위안이었는데, 달러로 환산하면 2천달러를 웃도는 거액이었다.

그 돈을 김승욱과 동행으로 포시에트를 들락거렸던 사이에 판돈으로 빌려 탕진한 것 같았다.

공갈과 강압에 못이겨 써준 차용증서였다 하더라도, 자필에 지장까지 찍은 증서라면 효력을 의심받을 하자는 없었다.

그제서야 그들이 한밤중에 가택침입을 한 까닭이 강도짓 아닌 손씨에게 빌려준 노름판의 판돈을 대신 변상하라는 협박인 것을 깨달았다.

문득 젊은 시절을 공사현장의 해결사 노릇으로 보냈다던 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변씨는 해결사들에게 위협당하는 채무자가 어떤 재치나 수완으로 채권자들을 따돌려야 한다는 문제들에 대해선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줄행랑을 놓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된 태호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그렇다고 태호가 손씨의 채무를 선뜻 변상할 만큼 얼간이는 아니었다.

손씨와 의절이 된다 하더라도 태호 혼자 지출을 결정할 돈도 아니었다.

게다가 손씨는 벌써 서울로 떠나고 없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바로 코앞에서 언제 발사될지 알 수 없는 총구가 파리채처럼 들까불고 있었으나, 태호가 보여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시종 고개만 가로젓고 있었을 뿐인데, 한 사내가 입술에 허연 버캐가 보일 정도로 흥분되어 화증을 터뜨렸다.

"저샤오쯔 상나얼취러?" (這小子 上口那兒去了:그 놈은 어디로 갔나?)

그는 태호의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물었다.

"취한궈러 하이스 짜이궈네이 둬치라이러?" (去韓國了, 還是 在國內 起來了:한국으로 갔느냐, 아니면 중국 영토 안에 숨어있느냐?)

중국어로 지껄이고 있는 품이 태호와 언어소통이 가능한 줄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으름장에 불과한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태호는 떠들고 있는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은 손씨의 사사로운 부채까지 책임질 입장이 아니라는,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 싶었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다.

답답하긴 사내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순간, 사내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고, 뒷전에서 수수방관하고 있던 일행 중 한 사람을 턱짓으로 불렀다.

그리고 다짜고짜 사내의 면상을 주먹질해서 고꾸라뜨렸다.

"니즈다오, 바니다이다오저리라이더위안인마?" (니知道, 把□帶到這里來的原因마:너를 여기까지 데려온 까닭을 모르느냐?)

방바닥에 콧등을 박고 고꾸라진 사내의 입술에서 금세 피가 흘렀다. 예측할 수 없었던 장면이 벌어진 것이었다.

시종 태호에게 총기를 겨냥하고 있는 사내 역시 싸늘한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볼 뿐 만류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직은 확연히 드러난 것이 아니었지만, 패거리들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열이 있다는 것은 이들이 조직적인 폭력배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다혈질의 사내가 셋 중에선 우두머리 행세를 하고 있었다.

얻어맞은 사내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고,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다.

다혈질의 사내가 다시 욕설을 퍼부었고, 그는 자지러질 듯 놀라 흩어진 자세를 가다듬었다.

섣불리 늑장을 부리다간 또 다른 발길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익히 눈치채고 있음이었다.

쥐어박힌 사내가 그때까지 두 팔을 자신의 뒷덜미에 울러메고 쪼그린 태호에게 다가서 입가에 어린양을 떠올리며 말했다.

"선생, 사실은 나도 선생과 같은 조선족입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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