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밖으로도 당당한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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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6.25전쟁 기간 중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이 새삼 이슈로 떠올랐다. AP통신의 첫 보도 후 뉴욕타임스 등 유력 매체들이 잇따라 동조보도에 나서 미국 내에서 여론이 크게 일자 한.미 양국 정부는 뒤늦게 진상조사 방침을 밝히고 나섰다.

국내에서는 또 노근리말고도 비슷한 사건이 많다며 여기 저기에서 피해자.유가족들의 진정이 쏟아지고 있다. 남한지역에서 나타난 것이 노근리를 포함해 10곳, 사망자만 1천5백여명에 이른다. 그 대부분이 국내 언론기관의 입장에서는 이미 보도했거나 알려진 것이어서 뉴스라고 하기는 어렵다.

AP통신이 크게 보도한 노근리 사건을 국내 언론기관들이 뒤따라 크게 보도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미 언론 보도를 계기로 문제가 재조명되고 해결의 실마리를 잡게 된 것은 새로운 국면이고 상황의 진전임이 분명하다.

양국 정부가 이른 시일 안에 진상을 규명하고 적절한 사후조치를 해야 할 것이지만 노근리 사건의 이슈화 과정이 시사하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함께 곱씹게 된다.

노근리는 우리에겐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외국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고 미국 여론이 움직여 미국 정부가 진상조사 방침을 밝히기까지 국내에선 누구도 이를 이같은 방식으로 풀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론도 6.25 같은 계기에 산발적.단편적인 문제제기는 했었지만 지속적으로 파고들거나 국제 사회에서 여론을 일으킬 생각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사자들조차도 '혹시나 이런 문제를 꺼내면 사상적으로 의심받을까봐' 그동안 묻어두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미국의 잘못을 들춰내 문제삼는 것은 반미고, 반미는 곧 불순한 세력과 연결이라는 등식이 사실상 통용돼 왔기 때문이다.

계기야 어찌 됐든 반세기가 지나도록 정리하지 못한 과거를 이제라도 정리하게 된다면 다행스런 일이다.

노근리만이 아니라 문제가 제기된 모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억울한 죽음을 더 이상 모른 채 묻어두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정부 당국의 자세가 눈총을 받고 있다. 노근리 보도 후 미국 정부의 적극 대응과는 대조되는 소극적인 태도 때문이다.

이런 자세가 반드시 정부만도 아니라는 게 더 문제다. 국회조사단이 현지에 가서 보여준 행태가 드러내듯 우리 사회 상층부의 의식.인식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정부 수립 이후 주변국과의 대외교섭에서 우리 정부의 자세는 늘 노근리 사건에 임하는 것과 비슷해 소극적이고 수세적이었다.

전통과 체질이 된 느낌까지 준다. 반세기가 넘도록 불평등 상황에 개선이 없는 한.미행정협정에서부터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변질된 법을 통과시켰다가 뒤늦게 보완조치를 내놓은 재외동포법 소동까지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를 1차적 임무로 하는 국가와 정부가 자국민의 이익을 끝까지 지키려 하기보다 외국의 입장을 국민에게 수용하도록 강요하는 존재로 비친다면 그 국가와 정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이제 진지하게 자문해 볼 때다.

국민의 이익을 지키는 자주국가의 책무와 관련해 미국에서 간첩죄로 복역 중인 로버트 김이 최근 보낸 공개질의서는 통렬한 고발장 같다.

홍순영(洪淳瑛) 외교통상부장관과 조성태(趙成台) 국방부장관 앞으로 보내진 그의 질의서는 "내가 대한민국의 스파이였습니까, 아니었습니까" 하고 정부의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간첩혐의를 벗기 위해 '공모' 를 했다는 한국군 장교를 재판 증언대에 세우고 싶었으나 한국의 입장을 생각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며 "그후 나의 억울한 혐의를 벗겨주기 위한 한국 정부의 협조를 기대하고 탄원도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어 공개질의를 한다" 고 밝혔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유대계 미국시민 조너선 폴러드에 대해 이스라엘측이 몇년째 미국 정부를 상대로 석방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바다.

그러나 로버트 김 사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지금도 그가 미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있다.

과연 옳은 대처인가. 여건을 탓하면서 바깥에 대해서는 고분고분하고 안으로 국민에게만 참으라고 요구하는 정부는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당당한 정부라야 국민의 충성을 요구할 수 있다.

문병호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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