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허성욱 '풀피리 나들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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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나들이 나들이 풀피리 나들이 갈수록 훤한 길이 어디로 가나요

아주 먼 땅에는 홀로 사는 유년의 하늘, 해당화꽃이 피어 순금이 얼굴도 보이고 너구리 풀숲으로 상여집을 지나가면 수굿이 방죽 하나 기다립니다.

무엇이든 오래되어 잊히기도 하련만 발부리의 목책은 낯익은 목소리로 어제 일도 그제 일도 챙겨가며 물어보니 지나간 세월은 오막조막 둘러앉아 청보리를 굽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렇고 말고요. 여기에선 사는 일이 소꼽놀이랍니다.

비바람에 바래진 나그네 마음에서도 색동옷이 핼쑥하게 어울리고요.

소를 타고 집에 가면 방촌길 저녁놀도 얼굴에 비치어 꽃송어리 같습니다

하늘이여, 어디를 걸어가도 저절로 닿고 마는 풀피리 언덕이여.

누구를 기다리는 빛나는 하루인지 햇빛 속으로 달빛 속으로 떠나간

동무들이 허공을 걸어오는 발꿈치가 보입니다.

- 허성욱(43) '풀피리 나들이'

아, 오랜만에 시같은 시 만났소이다. 아니, 고려가요의 어떤 얼굴을 만났소이다. 그 무슨 관념과 의식의 돌격대 같은 언어가 아닌 인간의 고향에 서려있는 핏줄 같고 아지랑이 이는 봄날 같은 언어를 만났소이다.

시가 의미를 드높여주는 노래이고 노래를 빛내주는 의미를 더하는 일이 으뜸이건대 여기 이 '풀피리 나들이' 를 어찌 따르리. 이런 시는 나중에 중학교 교과서에 들어있으면 참 좋겠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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