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사건 49년간 9차례 진상규명 호소 韓·美정부 책임회피로 일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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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의 유족들은 요즘 어리둥절할 정도로 감개무량하다. 마치 수십년간 가슴 속에 묻어왔던 원통함이 일시에 사라진 듯한 착각도 든다. 그토록 뼈아픈 '자신들' 만의 기억이 국민의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지금까지 한.미 양국 정부 등에 공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배상요구 등 법적 구제요청 다섯차례를 포함, 모두 아홉차례나 된다.

최초의 대응은 60년 12월 27일 미군 소청사무소에 양민집단 학살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지만 증거 불충분과 시효만료 등의 이유로 기각됐다.

3공화국 때는 입도 뻥긋 못했다. "이같은 주장을 하면 사상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 는 경찰의 으름장 때문이었다. 실제 유족 중 한명인 양해찬(梁海燦.57)씨는 문제제기와 관련, 경찰관서에 두차례나 불려갔었다.

정은용씨는 94년 4월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라는 제목의 자신의 비극적 가족사를 소설로 내고 진상규명대책위원회를 구성, 조직적으로 대응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대책위는 그해 7월과 11월 청와대와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보내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주한 미군사령관과 배상사무소를 거친 회신은 "미국 법률상 배상할 수 없다" 는 내용뿐이었다.

'적군과 교전 중 발생한 사건' 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인민군이 들어오기 전에 미군이 저지른 만행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이를 입증하는 각종 증거를 첨부해 사과 등을 다시 요구했으나 소용없었다.

대책위는 97년 8, 11, 12월에 청주지검 '배상심의회' 에 국가배상을 세차례나 신청했다. 그러나 소멸시효가 지나 청구권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기각당했다. 대책위는 같은해 12월 법무부 배상심의회에 재심을 요청했으나 98년 4월 같은 이유로 기각당했다.

대책위는 이밖에 97년 9월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상.하원 의회에 각각 진정서를 전달하고 12월엔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에게 호소까지 했었지만 결과는 없었다.

영동〓안남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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