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비틀거리는 동구] 4. 정치 불신과 무력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시민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 동유럽 현장취재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체제변혁과 함께 공산독재의 틀은 무너졌지만 여전히 선진 민주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국민선출이라는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권위주의 체제는 견고하다. 새 정치를 바라는 시민욕구가 번번이 좌절되면서 시민들 사이엔 무력감이 팽배하게 번져 있는 것이다.

시민들의 무력감은 정치수준과 사회의 성숙도가 떨어지는 발칸지역에서 특히 심했다. 9월 8일 코소보 프리슈티나의 평화유지군 사령부 앞에서 마케도니아인 수십명이 몰려 지나가는 서방기자들에게 마케도니아 정부를 비방하는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지난 2월 중국과 단교하고 대만과 수교한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당시 키로 글리고로프(82)대통령이 방송에 나와 "외교.국방을 맡은 나의 헌법적 권한은 무시됐다.

루브코 게오르기에프스키(33)총리가 여론도 무시한 채 독단으로 결정했다" 고 항의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블라트코 아브라몹스키(35.무역업)는 "대통령이 허수아비가 될 정도로 법도 절차도 없고 여론이 외면당하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라며 "요즘 사는 낙은 맥주뿐" 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마케도니아엔 '스콥스코' 맥주가 80%의 시장점유율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국민맥주로 통한다. 올들어 스콥스코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2배나 늘었다고 한다.

마케도니아 인구는 2백만. 그곳에 지난 98년 총선때 등장한 정당 수는 모두 26개. 지금은 더 늘어 31개나 된다.

"각 정당들은 정치인들의 집단일 뿐이지 국민과는 동떨어져 있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한다. 물론 밀실흥정으로. 그러다 보니 갈수록 국민들의 요구는 뒷전에 밀리고 집권층은 연립형태이면서도 권위주의로 흐르고 있다. "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의 중심가 엘렉트로 스토판스트보 광장에서 만난 나타샤 소콜로프스카(26.번역가)는 "무늬만 민주주의일 뿐 제도나 정치인의 자질, 국민의식수준 모두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한 상태" 라고 말했다.

정치불신이 국민들의 무력감을 불렀다는 설명이다. '나는 통제에 대항해 싸워야 할 더 많은 이유가 있다네. 나는 빛이 필요하거든' .

유고연방 록그룹 칸다코자의 '올바른 방향' 이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다. 권력에 대항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이 노래가 지난 8월 31일 오후 4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베오그라드의 중심지 공화국광장의 한 콘서트에서 울려펴졌다.

유고의 반정부 방송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폭격 직후 정부에 접수됐던 방송국 B-92가 B-292라는 이름으로 재개국하면서 개최한 축하 콘서트에 이 그룹이 등장한 것이다.

퇴근길(유고의 출근시간은 오전 7시, 퇴근은 오후 2시~3시)의 시민과 젊은이 3천여명이 모였지만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유고내 최고 인기그룹이라는 다크우드 덥이 등장해 '시스템에 돌을 던져라' 는 은유적 내용의 반정부가를 부를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만난 안젤리아 안드리치(25.회사원)는 "왜 시민들이 이렇게 조용한 줄 아느냐" 고 묻고는 "야당이 시원찮고 언론에 재갈이 물려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새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 이라고 스스로 답했다.

밀로셰비치는 지난 97년 언론통제를 목적으로 새 언론법을 만들었다. 정부가 언론보도에 이의를 제기하고 거액의 벌금을 물릴 수 있게 한 것이다.

미롤류브 스토야노비치(43.연구원)는 "새 언론법으로 언론이 재갈물리면서 나라를 개혁시킬 수 있는 길도 완전 봉쇄됐다" 며 한숨을 쉬었다.

항공사 직원 롤라 부슈코비치(39)는 "11월 총선에서 밀로셰비치가 설사 다수의석 확보에 실패하더라도 어떻게든 연정을 이뤄 재집권 할 것" 이라고 전망했다.

야당이 정강정책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명망가인 당수 개인의 사당(私黨)처럼 돼있어 당수 개인의 이익에 따라 사분오열되다 보니 시민들의 의사를 제대로 수렴.대변하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부슈코비치는 "야당은 언제든 현정권과 밀실흥정하려 한다. 그러니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요구가 반영될 리 있겠느냐" 고 반문했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8년째 유학 중인 조희영씨는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은 4년 전 총선에서 언론을 장악해 친정부 홍보에 주력한 덕에 여당을 또다시 승리로 이끌었다. 그 이후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허무적 발언이 많아졌다 "고 말했다.

개혁이 비교적 성공했다는 헝가리는 사정이 크게 달랐다. 8월 31일 오후 11시. 부다페스트에서 새로운 젊은이들의 거리로 부상한 리스트 페렌스 광장에 위치한 카페 인코그니토에서 만난 아틸라(25.회사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보다 나은 모습일 것" 이라고 말했다.

정치적인 주관도 뚜렷했다. 그는 "체제변화를 이끈 헝가리 민주포럼(MDF.89년 이후 첫 집권당)도 시간이 변하면서 보수화했다. 때문에 35세 이하의 청년들이 만든 시민정치포럼에서 시작해 현재 집권당이 된 청년민주동맹(FIDESZ)을 적극 지지한다" 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손으로 정권을 바꾸고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개혁.개방체제가 너무 마음에 든다" 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