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는 동구] 2. 무기력한 大國 러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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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러시아 극동 캄차카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캄차츠키는 옛 소련의 어업전진기지였다. 한때는 하루에 수백척의 배가 정박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이 도시의 파시(波市)는 러시아의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장관(壯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캄차츠키에 사는 이고르 세르게예비치(45)는 이곳 수산물 가공공장인 마라톤사의 생산조장이었다.

모스크바 등 내륙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1.5배나 많은 월급에 1.5배나 많은 휴가(연 45일)를 즐겼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은 부두에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가공선들에 날품을 팔면서 하루하루를 꾸려가고 있다. 94년 마라톤사가 문을 닫으면서 실업자가 됐기 때문이다.

소련이 몰락한 뒤 러시아의 연방정부는 명태.연어.왕게 등 황금어종들의 어획쿼터를 외국에 팔았다. 한국.일본.폴란드.중국 등의 어선이 몰려들어 수산물을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러시아배가 잡아다 주는 수산물은 공장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마라톤사가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연방정부는 어획쿼터를 판 돈을 몽땅 모스크바로 가져가 버렸다. 외국의 어선들이 판을 치면서 이곳의 수산업이 시들고 이고르 같은 실업자들이 수천명 쏟아져 나왔지만 연방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우리를 버렸다" 고 이고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모든 돈이 모스크바로 들어가기만 했지 나오는 게 없다" 는 것이다.

옛 소련 시절엔 중앙정부가 배정해준 기름으로 이곳의 화력발전소 두 곳은 1년 내내 가동됐다. 그래서 따뜻한 온수와 전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1년에 석달 이상씩 전기가 끊긴다.

이고르의 부인 마리나(32)는 6월만 되면 찬 물에 식료품을 담가둔다. 전기가 끊겨 냉장고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와 올해 6월 한달 내내 전기가 끊겼다. 겨울에 대비해 기름을 아낀다는 이유였다. 그러고도 지난해엔 10월 한달, 11월과 12월에도 열흘씩 전기가 끊겼다.

생필품이 부족해 설탕.식용유 등의 가격이 러시아에서 가장 비싼 것도 무리가 아니다.

캄차츠키뿐만이 아니다. 북극해 지방.시베리아의 오지 개척지역.중부내륙지역 등 러시아의 3분의1이 연방정부의 무관심으로 배고프고 추운 겨울을 나야 한다.

옛 소련 시절엔 이들 지역에 대한 식량수송이 10월에 모두 끝났고 예산배정도 8월에 모두 이뤄졌다.

그러나 지금의 정부는 이들 지역에 대한 의무를 아예 포기해 버리다시피 했다. 주지사들이 매일같이 모스크바를 향해 특별예산 배정을 호소해도 소용이 없다. 재정수입이 빈약한 연방정부로선 어쩔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 투자자본의 80%가 집중되는 서쪽 지역의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 인구 1천만명의 모스크바는 벤츠600 등 최고급 외국승용차가 넘쳐난다. 하루에 1백만달러 이상의 판돈이 오가는 카지노가 수십개씩 난립하고 매일 밤이 불야성이다.

일반 근로자들의 월급도 지방도시보다 평균 두배 이상이고 일자리도 풍부하다.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연방정부의 무능력에 분노한 타타르스탄.스베르들로프스크 등 일부 지방의 주지사들은 지난 8월 "연방이 지방 지원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연방에 낼 돈을 내지 않겠다" 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칼자루는 영방정부가 쥐고 있다. 전기.석유.가스 등 중앙공급식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거대 국영기업들은 모두 연방의 손아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이번 겨울을 나는 게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 라고 은근히 지방정부 수장들을 협박하고 있다.

체첸사태에서 보듯 카프카스 공화국들은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타타르스탄.바슈코프스탄 공화국들은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처럼 ▶연방정부에 대한 지방의 도전▶경제침체▶체첸 등지의 국지분쟁▶차기대권 쟁탈전 등이 어우러져 무기력한 수렁의 나락에 빠져 있다.

자본주의가 곧 꽃필 것 같던 몇해 전의 분위기는 간 곳이 없다. 계획경제는 일거에 무너뜨렸지만 그를 대신할 시장경제는 아직도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루블화의 평가절하에 의한 국내총생산의 증가, 국제원유가의 상승에 의한 세수(稅收)증대, 자본수지 흑자 등 긍정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패한 정치인들은 계획경제가 빠져나간 공백을 메울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계층.지역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극심해졌다.

12월의 총선과 내년 6월의 대선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직은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난 8년 동안 계속된 친(親)서방 개혁정책의 쇠퇴는 불가피해 보인다. 아울러 옛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향수도 더욱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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