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 전투병 파병 '半쪽 통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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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여야가 격돌한 '동티모르 파병 동의안' 은 처리 마지막 순간까지 진통을 보였다. 여권은 단독처리 방침을 고수했고, 야당은 표결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내부 혼선을 보였다.

동티모르로 떠나게 될 군(軍)과, 보내는 국민에게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 모양새였다.

여야는 28일 오전 동의안 심의에 나선 통일외교통상위 회의에서부터 대치와 격돌을 거듭하며 시종 찬반(贊反)의 평행선을 달렸다.

야당은 여야 총재회담까지 요구하며 저지의 배수진을 친 반면 여권은 "단 한자도 고칠 수 없다" 며 전투부대 파병 관철에 매달렸다.

파병동의안은 결국 한.일 어업협정 비준안 처리와 똑같은 수순인 '의장의 직권상정, 야당의 본회의 집단퇴장' 이라는 파행상을 반복했다.

◇ 본회의 및 총무회담〓한때 야당의 단상점거 사태가 예상되기도 했으나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동티모르 파병문제와 관련, 여야 총재회담을 긴급 제의하면서 상황이 다소 바뀌었다.

여야 총무들은 오후 긴급회담을 갖고 동의안 표결을 연기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청와대측과 수차례 전화접촉을 갖고 협상을 주도하던 국민회의 박상천(朴相千) 총무는 "총재회담 제의는 이 문제를 며칠 더 끌겠다는 야당의 원내전략에 불과하다" 며 부정적 입장을 보여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1차 회담에서 여야 총무들은 머리를 맞댄 끝에 일단 동의안을 28일 중으로 처리한다는데는 합의해 해결의 물꼬를 열었다.

이어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 총무가 당내 협의를 거친 뒤 "찬반토론에는 참여하고 표결때는 전원 퇴장키로 했다" 고 밝혀 상황이 최종 정리됐다. 곧이어 열린 본회의에서 여당측은 국민회의 김상우(金翔宇) 의원 등 3명이, 야당측은 박관용 의원 등 3명이 나서 '동티모르에 전투병 파병을 해야 하는 이유' 와 '전투병은 안되고 지원병만 파병해야 하는 이유' 를 각각 주장했다.

◇ 통일외교통상위〓국민회의.자민련측은 이미 충분한 논의가 끝났으니 파병동의안을 '표결처리' 해 본회의로 넘기자고 밀어붙였다.

반면 한나라당은 2~3일간 더 심의를 하자며 시종 '지연작전' 으로 맞서 결국 표결처리는 무산됐다.

이날 통일외교통상위는 여야의원들의 오전 의원총회 참여를 들어 오후 1시에야 전체회의가 시작. 그러나 개회와 동시에 "2시까지 상임위 통과가 안될 경우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하겠다" 는 박준규(朴浚圭)의장의 서한이 전달되자 야당측이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간사인 이신범(李信範)의원은 "의장의 직권상정 방침은 상임위의 논의절차를 무시한 처사" 라며 "촌각을 다툴 일도 아닌 만큼 충분히 논의한 뒤 다음달 2일 본회의에서 처리하자" 고 주장.

급박했던 상황을 반영하듯 유흥수(柳興洙.한나라당)위원장까지 나서 "의장실로 찾아가 하루만이라도 더 심의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고 가세, "편파적 운영" 이라는 여당측과 고성이 오갔다.

반면 국민회의의 박상천.김상우 의원 등은 "야당이 요청한 대로 국방장관과 동티모르 현장조사단장까지 불러 보고를 듣는 등 충분한 논의를 마쳤다"

"내일부터 국감이 시작돼 더 이상 논의가 불가능하다" 며 회의속개와 표결을 거듭 요구했다.

◇ 여야표정〓국민회의는 오전 이만섭(李萬燮)총재권한대행 주재로 고위당직자회의를 열어 파병동의안을 표결처리키로 결정했다. 李대행은 "한나라당이 정정당당히 표결에 참여하길 바란다" 고 촉구했다.

특히 이날 관광엑스포 순시차 강원도를 방문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황학수(黃鶴洙).이용삼(李龍三)의원 등 당 소속 강원도 출신 의원들이 수행하지 말도록 지시하는 등 표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자민련 당5역회의에서 박태준(朴泰俊)총재는 "우리나라도 유엔 때문에 살아남았고 앞으로 또 유엔의 지원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며 파병동의안 처리를 위한 철저한 대책마련을 지시했다.

한나라당은 오전까지만 해도 본회의장.국회의장실 등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단상점거조.돌격조 등으로 저지조를 짜는 등 실력저지하자는 강경론이 압도적이었다.

의원들은 외부로 나가는 것을 삼간 채 아예 의총장에서 도시락을 먹는 등 결연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잇따른 회의를 통해 "실력저지보다 반대 입장을 알리는 게 시급하다" 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비공개로 열린 의총에서 의원들도 일제히 정부.여당에 포격을 퍼부었다. 김기춘(金淇春)의원은 "동티모르 치안유지 파병은 한마디로 사치" 라며 "유엔의 요청이 있더라도 국익에 반하면 거부할 수 있다" 며 반대론을 폈다.

김무성(金武星)의원은 "우리가 파병을 하면 인도네시아 교민들이 현지에서 반대시위를 벌이겠다고 하는데 이는 보복테러에서 벗어나려는 것" 이라고 거들었다.

그러나 유흥수 의원 등이 "단상을 점거하면 전투병 파병 반대가 아니라 아예 파병 자체에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 며 신중론을 펴면서 야당의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졌다.

이원복(李源馥)의원은 "여당의원 중에서도 반대파가 있으니 크로스 보팅을 하자" 며 중재안을 냈다.

李총재가 "앞으로 총선 때까지 실력저지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 이라며 "이 문제는 의사관철보다 우리의 입장을 알리려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며 '표결시 퇴장' 지침을 정하자 논란이 일단락됐다.

최훈.이정민.최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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