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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스스로 돕는 농촌 풍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태풍 '바트' 가 하필이면 즐겁고 풍요로워야 할 한가위날에 북상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좌불안석이 됐었다.

추석 연휴에 경남과 전남 등 태풍 피해지역 농촌을 돌아보면서 너무도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충격과 함께 신선한 감동을 느꼈다.

아무리 추석 명절이라 하더라도 다 지어놓은 자기 논의 벼가 쓰러져 땅에 달라붙고 싹이 나는데도 들판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지역을 돌아볼 때는 참으로 가슴이 무너질 듯했다.

그러나 하동군 고진면에 도착해서는 이와는 다른 모습을 목격했다. 추석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면 직원과 면장, 그리고 작업복 차림의 군수까지 합세해 구슬땀을 흘리며 쓰러진 벼를 세우고 있었다.

군수가 직접 마을방송을 통해 "모처럼 고향에 왔으니 들판에 나와 벼 세우기에 동참해달라" 고 귀향객들에게 호소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덕분이었다.

예로부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고 했다. 이곳은 지난해에도 추석 전 태풍 '얘니' 가 들판을 할퀴어 가장 피해가 심했던 지역이다.

그 때도 이 지역의 벼가 대부분 세워져 있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하동군민들과 일선 공무원들의 부지런함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지역일수록 중앙정부에 아쉬운 요구를 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농림부가 도와줄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으나 군수는 "뭘요, 정부에서 다 잘해주는데요. 우리가 할 몫만 남았습니다" 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맡은 바 역할과 직분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구노력에 힘쓰는 이곳의 농민과 공무원을 대할 때 진심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하동군을 뒤로 하고 남해로 방향을 잡았다. 지난해 10월 남해를 방문했을 때 한쪽에서는 벼를 수확하고 한쪽에서는 논을 갈아엎어 마늘을 심느라 온 들판에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있어 우리 일행은 '진짜 사람이 사는 동네구나' 라고 감탄했었다.

이번 추석에도 예년과 똑같이 남해 들판엔 귀향자와 고향사람들이 어울려 벼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국평균 호당 경지면적 1.4㏊에도 훨씬 못 미치는 0.8㏊를 보유한 남해 농민들이야말로 개미처럼 일해 대부분의 농가가 자녀들을 대학까지 진학시키고 있는 곳이다.

더구나 농삿일이 어렵고 살림이 힘들지만 불평 한마디 크게 내지 않는 곳이다.

기본적으로 농정(農政)은 지방 현장행정이다. 지난 정부의 42조 투융자 사업이 실패냐, 성공이냐 말들이 많지만 이들과 같이 부지런한 공무원과 지역민이 있는 곳에는 정부 지원이 다다익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지역엔 아무리 지원을 쏟아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임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농정의 책임도 중앙정부의 몫과 지방정부의 몫을 엄격히 구분,점수를 매겨 각자의 책임을 물어야할 때가 됐다. 그것이 바로 민주농정이며 책임농정이다.

올해부터 농림부는 처음으로 현장지원 점검반을 가동해 사무관급 이상 직원들이 시.군 지역을 하나씩 담당케 했다. 이들은 그간 두차례의 현장 농정평가와 현장지도를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농정 성과의 핵심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이 극명히 드러났다.

하동과 남해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흙을 사랑하고 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며 그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기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존경스런 농민들, 그런 사람들과 공무원이 살고 있는 '살아있는 고장' 이 전국으로 널리 퍼져나가길 바란다.

김성훈 농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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