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31. 한국영화아카데미 그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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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사람들'을 말하기 전에 글들이 모여있는 '집'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때가 있다. 비록 서로 모이ㅏ게 된 동기가 충만했더라도 막상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인연이 세상사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라는 집. 80년대 초반 우연히 '시네마 천국'을 꿈꾼 사람들이 모여 일가(一家)를 이루고 그 결집된 힘을 9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의 추동력으로까지 연결시킨 특이한 집단의 이름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지난 84년 3월 창립, 벌써 제목소리를 낼 수 있는 15년이 흘렀다.

교육법상 정규학위를 주는 학교가 아닌데도 이 '유사(類似)학교' 가 한국영화에 던진 충격파와 문제의식, 변화의 바람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이 집단을 통해 한국영화는 드디어 이전의 전근대성을 극복할 수 있었다" 고 말할 정도다.

그럼 지금껏 그 집에서 동문수학한 실질적 주인이자 한국영화계의 무서운 세력으로 등장한 이들은 누구인가.

올 3월 졸업한 제14기 졸업생까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거친 영화계 일꾼은 총 1백91명.

그중 90%이상은 90년대 문제작을 만든 중견감독이거나 막 꿈나래를 펼친 감독 지망생들로 우리 영상상업의 듬직한 대들보나 다름없다.

당초 1년 단기과정(96년 13기부터 2년과정이 됨)으로 출발한 이 아카데미의 첫 졸업생(1기)은 모두 9명. 정규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까지 마친 열혈청년들로 '삶이 곧 영화' 임을 주장한 실천파였다.

'결혼이야기' '북경반점' 을 만든 김의석(42)감독을 비롯, '영원한 제국' 의 박종원(40),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의 오병철(41), '그들만의 세상' 의 임종재(41), '게임의 법칙' 의 장현수(40),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 의 황규덕(39)감독과 평론 겸업의 동국대 유지나(39.영화평론가).영상원 김소영(38).계원예대 이용배(40)교수가 그들이었다.

이중 김의석.박종원.오병철.장현수씨는 기존 연극영화과 출신이었다. 현재 동문 중 유일하게 영화아카데미에 남아 제자이자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는 제1기 황규덕 주임교수는 "애초부터 영화아카데미는 반(反)충무로적이었다" 고 설립 당시를 회고했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 연극영화과 진학했던 인력이나 소위 대학물을 먹은 '먹물' 들이 전근대적 도제시스템에 의존하던 충무로을 기피하면서 그 대안으로 영화아카데미가 인기를 끌었던 것. 철저한 현장교육과 더불어 사실 이게 이 아카데미의 제일 중요한 설립 목표이기도 했다.

90년대가 되기까지 영화아카데미는 5차례의 인력을 배출했다. 인력의 수준은 높아졌고 지원자도 날로 늘어났다. 이 사이 졸업생으로는 '내일로 흐르는 강' 의 박재호(41), '모텔선인장' 의 박기용(39), '개같은 날의 오후' 의 이민용(41), '그대안의 블루' 의 이현승(38), '구미호' 의 박헌수(40), '처녀들의 저녁식사' 의 임상수(37) 감독 등이 포진했다. 촬영전공자도 배출돼 활동영역의 확장도 가져왔다.

'쉬리' 의 박현철(37), '송어' 의 진영환(41)기사 등이 이때 나왔다. 공교롭게도 88년 이 사회를 뜨겁게 달군 UIP직배 반대투쟁은 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의 입지를 훨씬 넓혀주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 '외화쿼터제' (한국영화 제작편수에 따라 외국영화 수입쿼터를 주던 제도. 외화수입을 위해 한국영화는 숫자만 때우기식의 대충 제작이 만연했다)에 눈이 멀어 한국영화에 관심이 없던 제작자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 시대는 영화 제작의 다양성을 요구했고, 이를 충족시키기에 충무로 시스템과 인력은 후진적이었다. 이 틈새를 뚫고 아카데미의 '독학생' 들이 젊은 피로 가세했다.

그 사이 여성감독도 배출됐다. 지난해 데뷔작 '미술관 옆 동물원' 으로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이정향(35)씨가 아직까지 유일한 아카데미출신 여성 감독. 서강대 불문과를 졸업한 이감독은 제4기로 고참 선배급이지만 여성이란 약점 때문에 뒤늦게 메가폰을 잡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데뷔 감독중 막내는 9기 출신 허진호(36)씨. 지난해 그가 만든 한석규.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 가 작품성 못지않게 흥행에서 성공, 차세대의 복병으로 낙점받았다.

기획자로는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쉬리' 의 기획자로 활동했던 노종윤(35.5기)씨가 거의 혼자 뛰고 있다.

그러나 아직 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이 어떤 공통분모를 가진 한국영화계의 흐름을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 프랑스의 누벨바그(새로운 흐름이란 뜻의 50.60년대 영화운동)나 뉴저먼시네마(독일 빔 벤더스 감독 등이 이끈 영화운동) 등 '문화혁명' 의 기운은 약하다는 뜻이다.

"막강한 충무로의 세력을 벗어나서도 자생력을 키웠듯 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은 새천년 한국영화의 주역으로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 사진 촬영장에서 만난 동문들의 힘찬 함성에서 벌써 그날이 느껴지는 듯 했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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