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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은 삽자루, 농협은 골프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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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대학생 때 농협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농민의 아들인 덕에 ‘농협 장학금’을 받았던 것이다. 고향의 면(面)조합장은 “열심히 공부하라”며 자장면까지 사주셨다. 1980년대 초의 일이다. 장학금은 딱 한 번 받았지만 참 고마웠다. 농민에게 농사정보도 알려주고, 돈도 빌려주고, 농산물도 팔아주는데 장학금까지 주니….

‘좋은 기억’을 되새기며 가끔 서울 서대문로터리 부근의 농협박물관에 들른다. 조선 단종 때 좌의정을 지낸 절재(節齋) 김종서의 집터에 지은 박물관에는 ‘농촌의 추억’이 담겨 있다. 쟁기·따비·용두레·디딜방아 등 각종 농기구와 4계절 시골 풍경에 빠져 동심에 젖곤 한다. 농협은 월별 농기구도 선정하는데, 10월은 지게다. 벼를 ‘쌀 나무’라고 한다는 요즘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장이 될 법했다.

박물관 곁의 농협중앙회 본관은 언제 봐도 근사하다. 최신식 건물에 사무실도 널찍하다. 본관 앞에는 또 다른 고층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국민의 먹을거리를 책임진 농민을 위해 일하는 농협중앙회 임직원을 위한 것이니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건물 곁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개운찮다. 요즘 더 그렇다. 대풍이지만 농민은 걱정이 태산이다. 비료·농약 값, 인건비는 치솟았는데 쌀값은 10년 전과 별 차이가 없어서다. 농사지을수록 빚만 늘어난다며 자식 같은 벼를 갈아엎는 농민도 있다. 억장이 무너지는 그 심정, 넥타이 맨 도심 한복판의 농협직원이 알까.

농협의 주인은 농민이다. 농협직원 존재의 이유는 조합원이자 주인인 농민을 잘 받드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열심이다. 하지만 일부 ‘미꾸라지’의 비행은 참기 어렵다. 피 같은 농민의 돈을 빼돌려 개인주식에 투자하고, 유흥비로 펑펑 쓰고, 개인카드 대금을 돌려막는 사람들 말이다. 최근 3년간 35명이 137억원을 횡령했지만 고발된 이는 8명뿐이다. 최병원 농협중앙회회장은 “평소 조직 기여도 등을 고려한 조치”라고 말했다(5일 국정감사). 도덕적 해이의 극치다.

더욱 가관인 것은 골프다. 농협은 모두 820억원어치의 골프회원권을 갖고 있다. 1년간 농촌 대학생 1만 명의 학비 전액을 대줄 수 있는 돈이다. 최 회장은 “간부들이 주말에 골프접대를 하며 일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주인은 손에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삽질을 하는데 머슴은 골프채를 쥐고 ‘나이스 샷’을 외치고 있는 꼴이다. 대학생 장학금은 더 실망이다. 지난해 직원 자녀에게는 189억원을, 농민 자녀에게는 35억원을 지원했다. 주객이 완전히 바뀌었다.

농협이 곧 개혁안을 내놓는다고 한다. 농민을 앞세워 임직원만 호사한다는 세간의 비난을 안다면 제대로 해야 한다. 한 몸통인 신용(금융)과 경제(농축산물 유통) 사업의 분리가 그 골자다. 진정으로 농민을 위한다면 농축산물 부문의 경쟁력을 높여 협동조합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전체 직원의 70%가 매달린 돈놀이(금융)사업 정비도 필수다. 농협을 농민에게 돌려주는 일, 그것이 개혁의 핵심이다.

양영유 교육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