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 517.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제11장 조우

"나가 이렇게 싸질러 다니다가 정말 오줄없는 장돌뱅이되는 거 아닌지 모르것소. " "맛깔스럽게 끓인 라면 먹다가 느닷없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우리와 만나기 전에도 방형은 내로라 하는 장돌뱅이였잖소. 내가 물귀신처럼 끌어들였소?"

"아니랑게. 한선생을 탓하는 게 아녀. 시장에 있는 공중화장실 곁에서 새복 두시에 끓여 먹는 라면맛 달기가 꿀이고 보면 나 사주팔자가 소똥개똥 속에서 뒹굴어야 나 몫을 한다는 뜻이 아니것소. 물건 파는 데는 숙맥인 어촌계 사람들 품앗이로 시작한 바지락 장사를 하다 보니 여편네들 데불고 시장으로 나가서 막걸리로 요구나 하는 걸 낙으로 삼았는디, 나가 느닷없이 평상 오고 싶지도 않던 서울 가락시장에 나타나서 새복 두시에 라면을 끓여 먹고 앉았어도 맘에 께림칙한 게 없고, 느긋하기 그지 없으니 이게 보통일이 아니어라. 사주는 타고난 것인디 궁합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한선생을 만나 이제 옳은 장돌뱅이가 되었드란 말이오. 이걸 대수롭잖게 넘길 일이것소?"

"별소리 다하네. 궁합끼리 만났다면, 방형보다 형식이가 면저였는데, 아직 쓴 술 한잔 나누며 자축했던 일이 없었어요. 술 생각 나서 꺼낸 말이란 걸 모를 줄 아시오. " "여기 있는데요. "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박았던 소주병을 비틀어 뽑으며 형식이가 거든 말이었다. 자동차에서 서너 시간 눈을 붙이기로 작정하고 한병을 둘이서 똑같이 나눠 마시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작 잠들기는 라면 먹던 그 자리에서였다. 곯아 떨어진 방극섭을 깨우기까지 한철규는 내처 뜬눈이었다. 방극섭의 입에서 단내가 씻기기까지 내리 네 시간을 한철규 혼자서 핸들을 붙잡고 씨름하였다.

고흥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 1시쯤이었다. 승희는 마늘 주산지로 손꼽히는 과역면과 풍양면 일대로 수매 (收買) 하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행중이 마늘수매를 시작하고부터 그 일대의 농가에서는 승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철규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산지 수매는 방씨와 승희의 몫이었고,가락시장 내왕은 한철규와 형식의 일이었다.

물론 생산된 마늘은 공판장으로 끌고가야 목돈을 쥘 수 있었기에 주로 공판장으로 내다 팔고 농가에서 갈무리하고 있는 것은 가용에 쓸 수량 정도였다. 가용으로 쓰려고 갈무리한 마늘은 상품이 많았다.

그러나 수해와 태풍을 연거푸 치른 이후 양념류와 채소류 값이 등다락같이 뛰기 시작했고, 깜짝 잇속을 노린 차떼기 도매상들이 시골의 산지로 벌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촌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해나 태풍의 피해가 그토록 극심할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불찰이었다. 성질 급한 농민들이 그런 피해를 보기 전에 무와 배추밭을 성급하게 갈아 엎은 것이었다.

물론 시기를 놓치기 전에 가을에 수확할 작물의 씨앗을 하루 빨리 뿌려보자는 계산이었지만 개중에는 여기 보란 듯이 시위용으로 갈아엎고난 뒤 남 모르게 속앓이 하는 축들도 없지 않았다.

이래저래 채소류의 품귀현상을 빚은 것이지만, 수요는 그럴수록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덩달아 가수요까지 붙어 값은 하루가 다르게 가파른 오름세를 타고 있었다.

도매상들이 이삭줍기로 산지를 들쑤시고 다녔지만, 적재함은 태반이 비어있었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든 방극섭과 승희의 수매는 순조로웠다. 터놓은 안면에 흥정이 까다롭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생산자들이 원하는 수매가가 적정선이면 두말없이 사들였고, 엄청난 차이가 있으면 아예 흥정조차 하려들지 않았다. 이문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은 땅 끝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모르지 않았다.

개명되고 되바라진 세상이어서 통화료 몇 푼이면, 당일의 서울 가락시장 경매가격 정보를 곧바로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은 사려는 사람도 알고 있었고 팔려는 사람도 알고 있었다. 흥정 자체가 그래서 무의미할 때도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