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16.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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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제11장 조우

대낮같이 불을 밝힌 경매장은 지방에서 올라온 채소류와 청과류 차량들의 북새통으로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경매에 참가한 중도매인들과 경매사.기록사들이 무리를 지어 차량들 사이를 비집고, 낙찰가액이 궁금한 원매인 (願賣人) 들이 그 뒤를 따라다니느라 수라장을 이뤘다.

한푼이라도 싸게 사려는 중도매인들과 한푼이라도 비싸게 경매되기를 바라는 원매인들 사이의 신경전은 경매장이라 해서 난장과 다르지 않았다. 아우성과 탄성이 끊이지 않고, 밟히는 것이 사람의 발등이었고 채소였다. 경매장에서 한발 비켜난 청과물 시장 모퉁이에서 가까스로 일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극섭과 형식은 화장실을 희미하게 비춰주는 조명등 아래에서 지금 막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조명등 아래로 다가서는 한철규를 발견한 방극섭은 대뜸 볼멘소리부터 퍼부었다.

"핑허니 댕겨오겠다던 분이 엽때까지 어디서 꾸물거리고 있었어라이? 나같으면 그 단새 중국 두 번 댕겨왔것네. 나가 이래라저래라 해쌓는 게 껄쩍지근하당가?" "전화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게 이렇습니다. "

"인천포구에 무사 당도했으면 시상없는 일이 있어도 헤찰말고 걸음아 날 살려라 고흥으로 내려오든지,가락시장으로 오든지 헐 것이지 뭣땜시 안면도까지 내려간 것인지 속을 모르것당게. 안면도에 뿌리박고 살던 사람들이 저그덜 집 잘못 찾아갈까 혀서 서울사람 이 길 안내했어라? 여그서 눈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의 속쓰린 맘은 안중에 없었어라?"

말은 비윗장 틀리게 하고 있었지만, 한철규를 반기는 눈치는 역력했다. 열없은 한철규는 김이 솟아오르는 라면 냄비의 뚜껑을 열어보며 딴청을 피웠다.

"어떻게 됐어요? 경매는 마쳤어요?" "징한 사람하구선. 보면 몰라요이? 시방 한선생 오면 멕일라고 라면 끓이고 있는 거 빤히 보면서 그런 소릴 혀요?" "몇 파수 더 뛰어야 할 것 같아요?"

"말도 마소. 남해안이며 서해안 할 것 없이 아우성들이 터졌뿌럿소. 평상 보고싶지 않은 불청객 때문에 어장들이 죄 거덜나뿌렀당게. 여름 내내 부랄에 진물이 마를 날이 없도록 푹푹 찌더니 나가 이런 변고 날줄 알았제이. "

"뭣 때문에 그런 일이 터졌어요?" "하필이면 적조현상인가 뭔가가 고흥 앞바다에서 터질 게 뭐요. 양식장에선 돔이며 우럭들이 떼죽음을 당해 멀쩡하던 어장들이 삽시간에 거덜났뿌렀당게. 우리 어촌계에서 뿌린 종패 (種貝) 들도 죄 씨가 말랐뿌렀으니 새조개하며 바지락도 캘 게 없게 되었소. 천상 채소장사로 벌충하며 연명할 수밖에 딴 도리가 있것소. "

"우리는 그나마 마늘장사나 채소장사로 연명한다지만, 갯벌에 엎드려 바지락만 캐먹던 어촌계 식구들은 그나마 당장의 생계가 막막하게 되었잖소?" "흰창 허옇게 뜨고 들어눕는 사람들이야 없겠지만, 텃밭이 폐농되고 말았으니 한동안 고상들 하겠지요이. 그러나 한선생 아시다시피 고흥은 워낙 기름진 땅으로 소문났어라. 질경이.억새씨라도 훑어다가 논에 뿌리면 나락 되는 게 고흥땅인디, 갯가에서 얻을 게 없으면 논밭에 기대 살면 또 그럭저럭 연명하게 되것지요이. "

갈라진 시멘트 바닥에 과일상자 찌그러뜨려 냄비 앉힐 자리 만들고 신문지 찢어서 사람 앉을 자리 만들어 수저까지 배열한 형식이가 식사 준비되었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코펠 뚜껑을 하나씩 챙겨들고 라면 냄비를 중심으로 바싹 조여 앉았다.뜨거운 국수가락을 훅훅 식혀가며 한참 게걸스럽던 방극섭이는 느닷없이 동작을 멈추고 그린 듯이 꼼짝 안했다. 의아해 눈으로 묻는 한철규를 처연한 눈으로 바라보며 혼잣소리로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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