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가 주눅들어선 안 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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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호 10면

디렉터스 체어 앞에 선 에르메스 코리아 전형선 대표. 올해 의자의 주인공은 ‘바보들의 행진’을 만든 하길종(1941~79) 감독이다. 이 의자는 10일 오후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열린 ‘한국 영화 회고전의 밤’에서 하 감독의 아들인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에게 전달됐다.

80년 된 스위스산 배나무에 10개월간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독일산 쇠가죽을 씌운 접이의자 등받이 뒤에는 ‘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 OCTOBER 2009 / HA KIL-CHONG’이라는 아담한 글씨가 초콜릿색으로 새겨져 있다. 장루이 뒤마 에르메스 전 회장의 부인인 고(故) 르나 뒤마(Rena DUMAS)가 직접 디자인한 디렉터스 체어다. 시가 1500만원 상당의 이 명품 의자가 부산국제영화제(PIFF) ‘한국 영화 회고전의 밤’ 행사를 장식한 것이 올해로 9년째. 에르메스 코리아 전형선(50) 대표는 2001년 부산 출장길에서 김동호 위원장과의 만남부터 얘기했다.

‘디렉터스 체어’ 선물 9년째, 전형선 에르메스 코리아 사장

“또 뭘 팔러 왔나 하는 표정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우선 ‘PIFF 옆에 에르메스 로고가 들어가면 국제 행사를 치르기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꼭 해야 하는데 후원이 없어 제대로 못하는 행사가 있다면 돕고 싶다’고 했어요. 이 행사를 말씀하시기에 그 자리에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젊고 인기 있는 배우와 그들을 쫓는 언론이 거의 외면하던 초라한 행사. 강우석 감독이 상금으로 받은 300만원을 내놓아 1만5000원짜리 뷔페와 소주로 치렀었다는 얘기에 그는 “울화가 치밀었다”고 했다. “스탠딩 파티의 개념을 도입했어요. 누가 와도 손색이 없게. 멋진 장소를 섭외해 조명에도 신경 쓰고 와인도 내놓고 장식도 근사하게. 지금은 참석자 중 외국인이 절반을 넘죠.”

젊은 현대 미술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그가 2000년 시작한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도 올해로 10년이 됐다.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 앞에 마련된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3층 ‘아뜰리에 에르메스’에는 11월 15일까지 올해 후보 작가 3명(남화연·노재운·박윤영)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실질적인 기획은 97년부터 시작했어요. 96년 에르메스 코리아를 설립하고 대표를 맡으면서 ‘에르메스가 영원히 추구해야 할 주제가 뭘까’ 고민했죠. 그건 예술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예술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는데, 이 경계를 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 선정은 심사위원단에 일임했죠.”

외국 기업으로선 첫 국내 미술계 지원 사례였다. 이후 비슷한 작가상의 시발이 됐다. 2000년 첫 회에 장영혜가 수상했고 이후 김범·박이소·서도호·박찬경·구정아·임민욱·김성환·송상희까지 나왔다. 올해의 수상자는 28일 발표된다.

“진정한 후원자는 장루이 뒤마 전 회장이었죠.” 전 대표의 회고다. “첫 보고를 마치니 하라 마라 정도가 아니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저보다 더 의욕을 보이셨죠. 미술상의 영어 이름이 한글을 풀어 쓴 ‘MISSULSANG’이라 붙게 된 것도 뒤마 회장의 배려였습니다.”

최근 베스트셀러인 『아웃라이어』의 ‘10만 시간(약 10년) 노력의 법칙’에 따르면, 이제는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 시작할 시점이다. 그는 “최근 곳곳에서 한국 작가들의 활약이 놀랍다”며 “국제화의 물꼬를 트고 계속 지원한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아쉬움도 토로했다. 우리 작가들의 자신감이다. “외국 시상식이나 파티에 가면 한국 작가들이 너무 주눅들어 있어요. 자신을 세련되게 마케팅하는 능력이 아직 부족해요. 정부가 이제는 작가들에게 옷 잘 입는 법, 와인 마시는 법, 스시 먹는 법 같은 것도 교육할 필요가 있어요.”

갤러리 운영, 스트리트 콘서트 진행 등 에르메스 코리아가 문화예술 지원에 쓰는 돈은 총 예산의 30%에 달한다. 그 열정 덕분일까. 교육프로젝트 지원작을 고르던 에르메스 재단은 에르메스 코리아가 낸 기획안에 막 오케이 사인을 마쳤다. “부산 소년의 집 로봇 클럽 아이들이 자신들이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수녀님께 물었대요. ‘그럼 우리 이제 학원 가서 배울 수 있는 건가요’라고. 이달 말엔 직원들 하고 부산에 내려가 애들한테 삼겹살 파티 제대로 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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